[한국명반]67위 양희은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한국명반]67위 양희은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Posted at 2010. 5. 30. 00:20 | Posted in 삶의한자락/미디어(영화,음악,TV)ㆍ아침이슬, 시대와 함께 울고 웃다
김민기와 양희은이 빚어낸 ‘아침이슬’은 단순한 유행가요가 아닌 시대의 상징이었다. 재킷 속에 등장한 한국 포크 대모의 첫 모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머슴 같은 청바지, 청남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였다. 하지만 맑고 청아한 보컬로 부른 이 환상적 콤비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노랫말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을 쳤다. “아침이슬의 이미지를 노래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작곡자 김민기의 덤덤한 작곡후기와 상관없이 이 노래는 무대보단 거리에서 더 인기였다. 1970~80년대 모든 시위 현장의 주제가였고 지금도 각종 모임의 대미를 장식하며 참석자들에게 강한 연대의식을 안겨주는 국민가요가 됐다.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항가수의 상징이 됐다. 이에 그녀는 “노래의 사회성에 대해 처절하게 느꼈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스크럼 짜고 나올 때 부르는 저 노래가 내가 부른 노랜가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았다. 노래라는 건 처음 세상에 내놓은 사람의 뜻과는 달리 각자 받아들이고 되불러주는 사람의 것이라는 걸 절감했다”고 회고했다.
71년 봄, 대한일보 강당 무대. 공연이 끝날 즈음 김민기의 서울대 미대 동급생 김아영이 양희은에게 그 노래의 찢겨진 악보조각을 건넸다. 그 조각난 악보를 테이프로 붙여 지금껏 간직할 만큼 ‘아침이슬’은 그녀를 감동시킨 최초의 노래였다. 71년 6월 라디오 PD의 주선으로 킹레코드 사장을 만나면서 음반 취입 기회가 왔다.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을 맡아 뚝섬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남산 어린이회관 앞 광장에서 재킷 사진을 찍고 4곡의 김민기 창작곡과 ‘오비스 케빈’에서 주로 불렀던 ‘일곱송이 수선화’ 등 6곡의 번안곡 등 총 10곡을 수록해 3개월 후 세상에 나왔다.
73년 정부에 의해 ‘고운 노래’상을 받았던 ‘아침이슬’은 이듬해 금지곡으로 둔갑했다. 시중에 배포된 모든 음반들이 압수되면서 평범치 않은 노래의 운명이 감지됐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200여곡 중 금지된 노래만도 무려 30여곡. 1집 수록곡 중 김광희곡 ‘세노야 세노야’를 제외한 ‘그날’ ‘엄마! 엄마!’까지 김민기의 곡은 74년부터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다. ‘시의 부적합’ ‘허무주의 조장’이란 게 금지 사유였지만 ‘아침이슬’엔 이유조차 없이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측의 인사를 암시한다는 억지 해석이 내려졌다. 1집 이후 시대의 해프닝은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꼬투리였고, ‘작은 연못’은 정권을 비꼰다는 이유로 주홍 글씨 낙인이 차례로 찍혀졌다.
금지된 노래들은 불멸의 생명력을 키워갔다. 오랜 기간 대중매체에서 사라진 곡들은 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소외된 노동현장에서, 국민들의 각종 모임에서 더욱 질긴 생명력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1만번도 넘게 불렀다”는 양희은의 증언처럼 ‘아침이슬’에 국민들은 ‘가장 즐겨 듣는 대중가요 1위’라는 사랑으로 화답했다. 그 노래가 최초로 수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양희은의 1집은 70년대 포크음반의 전설이 됐다.
< 최규성 | 대중문화평론가>
김민기와 양희은이 빚어낸 ‘아침이슬’은 단순한 유행가요가 아닌 시대의 상징이었다. 재킷 속에 등장한 한국 포크 대모의 첫 모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머슴 같은 청바지, 청남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였다. 하지만 맑고 청아한 보컬로 부른 이 환상적 콤비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노랫말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을 쳤다. “아침이슬의 이미지를 노래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작곡자 김민기의 덤덤한 작곡후기와 상관없이 이 노래는 무대보단 거리에서 더 인기였다. 1970~80년대 모든 시위 현장의 주제가였고 지금도 각종 모임의 대미를 장식하며 참석자들에게 강한 연대의식을 안겨주는 국민가요가 됐다.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항가수의 상징이 됐다. 이에 그녀는 “노래의 사회성에 대해 처절하게 느꼈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스크럼 짜고 나올 때 부르는 저 노래가 내가 부른 노랜가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았다. 노래라는 건 처음 세상에 내놓은 사람의 뜻과는 달리 각자 받아들이고 되불러주는 사람의 것이라는 걸 절감했다”고 회고했다.
71년 봄, 대한일보 강당 무대. 공연이 끝날 즈음 김민기의 서울대 미대 동급생 김아영이 양희은에게 그 노래의 찢겨진 악보조각을 건넸다. 그 조각난 악보를 테이프로 붙여 지금껏 간직할 만큼 ‘아침이슬’은 그녀를 감동시킨 최초의 노래였다. 71년 6월 라디오 PD의 주선으로 킹레코드 사장을 만나면서 음반 취입 기회가 왔다.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을 맡아 뚝섬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남산 어린이회관 앞 광장에서 재킷 사진을 찍고 4곡의 김민기 창작곡과 ‘오비스 케빈’에서 주로 불렀던 ‘일곱송이 수선화’ 등 6곡의 번안곡 등 총 10곡을 수록해 3개월 후 세상에 나왔다.
73년 정부에 의해 ‘고운 노래’상을 받았던 ‘아침이슬’은 이듬해 금지곡으로 둔갑했다. 시중에 배포된 모든 음반들이 압수되면서 평범치 않은 노래의 운명이 감지됐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200여곡 중 금지된 노래만도 무려 30여곡. 1집 수록곡 중 김광희곡 ‘세노야 세노야’를 제외한 ‘그날’ ‘엄마! 엄마!’까지 김민기의 곡은 74년부터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다. ‘시의 부적합’ ‘허무주의 조장’이란 게 금지 사유였지만 ‘아침이슬’엔 이유조차 없이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측의 인사를 암시한다는 억지 해석이 내려졌다. 1집 이후 시대의 해프닝은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꼬투리였고, ‘작은 연못’은 정권을 비꼰다는 이유로 주홍 글씨 낙인이 차례로 찍혀졌다.
금지된 노래들은 불멸의 생명력을 키워갔다. 오랜 기간 대중매체에서 사라진 곡들은 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소외된 노동현장에서, 국민들의 각종 모임에서 더욱 질긴 생명력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1만번도 넘게 불렀다”는 양희은의 증언처럼 ‘아침이슬’에 국민들은 ‘가장 즐겨 듣는 대중가요 1위’라는 사랑으로 화답했다. 그 노래가 최초로 수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양희은의 1집은 70년대 포크음반의 전설이 됐다.
< 최규성 |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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