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반]61위 김수철 ‘김수철 1집’[한국명반]61위 김수철 ‘김수철 1집’
Posted at 2010. 5. 30. 00:08 | Posted in 삶의한자락/미디어(영화,음악,TV)ㆍ작은 거인 ‘꽃 한송이’ 피우다
1978년 4인조 록 그룹 ‘작은 거인’의 리더로 음악 인생을 시작한 김수철은 같은 해 ‘일곱 색깔 무지개’로 히트의 첫 봉화를 피워 올리며 대중들에게 신고식을 치렀다.
그러나 대중음악인이라는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을 느낀 동료들이 주위를 떠나면서 그는 홀로서기에 들어가야 했다. 이렇듯 다소는 피동의 입장에서 발표했던 본 솔로 음반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대중 음악사를 능동적으로 다시 쓰면서 김수철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의 기억 회로 속에 영원히 아로새겼다.
음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별리’ 두 곡에 그 비등점을 두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봉우리를 형성했던 두 곡은 이후 국악에 경사될 그의 행보를 암시하는 시그널로서 작동했다. 이처럼 동서의 음악적 감성 모두를 섭렵하는 것으로 마음의 끈을 동여맨 그는 히트의 축포를 연발로 쏘아대면서 가요계 전체에 걸쳐 고공으로 비행했다. 우리 가락의 참 맛을 서양의 오선지에 녹여내어 양악과 국악 퓨전에 대한 가능태(可能態)를 제안했던 것이다. 두 곡 외에 ‘정녕 그대를’ ‘내일’ 등의 레퍼토리들이 우리 음악의 토속적 얼을 일깨워줬던 또 다른 이정표들이었다.
앞서 말했듯 음반에서 김수철의 전체적인 음악 인식은 동서의 조화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서태지와 신해철 등의 후배 뮤지션들이 국악을 테마 삼아 90년대 가요계를 맹진하기 전, 김수철은 그것의 밑그림을 이미 디자인해 제시했던 것이다. 한쪽에는 서구 록의 이론적 바탕을, 다른 한쪽에는 한국적 맥을 짚어나가는 선율을 배치한 그는 음악적 관측소를 확보한 뒤 자신이 느낀 삶의 질감을 주체할 수 없는 신명으로 노래했다.
그 우뚝한 두 기둥 사이의 공간에서 김수철 음악의 본령은 비로소 완성된 세계관의 틀을 구워낼 수 있었다.
자연스레 제왕 조용필에 필적할 유일한 맞수로 그가 떠오른 것은 대중적 잣대로나 음악적 평가 모두에 있어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영화 ‘고래사냥’ 출연과 10대 가수상 등 무려 15차례 이상의 수상 경력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솔로 활동 와중에도 국악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88년 발표한 ‘황천길’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국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본 솔로 1집의 풋풋한 총기(聰氣)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의 저편에서 활기찬 자태로 우리의 청(聽)감수성을 유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풍요로웠던 80년대의 일부를 자신의 지분으로 치환한 역사적인 명반이다. 동시에 김수철 음악 세계의 효시로서도 기능하며 그의 단독자적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처럼 아티스트의 개별성과 시대사적 맥락 모두에서 양가(兩價)적 성취를 굴착했기에 앨범을 향한 박수세례는 합당해 보인다. 보통 80년대가 음악적으로 다채로웠던 시절이었다고 사람들은 추억한다. 이 처녀작은 그 중심에 김수철이라는 작은 거인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대변하는 빛나는 주석이다.
〈 배순탁 | 웹진 IZM 필자 〉
1집 못다핀 꽃 한송이
타이틀곡
별리 못다핀 꽃한송이
장르/스타일
가요 > 발라드 , 락/메탈 > 락
발매정보
1983.08.15 (대한민국)
신세계음향
1978년 4인조 록 그룹 ‘작은 거인’의 리더로 음악 인생을 시작한 김수철은 같은 해 ‘일곱 색깔 무지개’로 히트의 첫 봉화를 피워 올리며 대중들에게 신고식을 치렀다.
그러나 대중음악인이라는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을 느낀 동료들이 주위를 떠나면서 그는 홀로서기에 들어가야 했다. 이렇듯 다소는 피동의 입장에서 발표했던 본 솔로 음반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대중 음악사를 능동적으로 다시 쓰면서 김수철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의 기억 회로 속에 영원히 아로새겼다.
음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별리’ 두 곡에 그 비등점을 두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봉우리를 형성했던 두 곡은 이후 국악에 경사될 그의 행보를 암시하는 시그널로서 작동했다. 이처럼 동서의 음악적 감성 모두를 섭렵하는 것으로 마음의 끈을 동여맨 그는 히트의 축포를 연발로 쏘아대면서 가요계 전체에 걸쳐 고공으로 비행했다. 우리 가락의 참 맛을 서양의 오선지에 녹여내어 양악과 국악 퓨전에 대한 가능태(可能態)를 제안했던 것이다. 두 곡 외에 ‘정녕 그대를’ ‘내일’ 등의 레퍼토리들이 우리 음악의 토속적 얼을 일깨워줬던 또 다른 이정표들이었다.
앞서 말했듯 음반에서 김수철의 전체적인 음악 인식은 동서의 조화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서태지와 신해철 등의 후배 뮤지션들이 국악을 테마 삼아 90년대 가요계를 맹진하기 전, 김수철은 그것의 밑그림을 이미 디자인해 제시했던 것이다. 한쪽에는 서구 록의 이론적 바탕을, 다른 한쪽에는 한국적 맥을 짚어나가는 선율을 배치한 그는 음악적 관측소를 확보한 뒤 자신이 느낀 삶의 질감을 주체할 수 없는 신명으로 노래했다.
그 우뚝한 두 기둥 사이의 공간에서 김수철 음악의 본령은 비로소 완성된 세계관의 틀을 구워낼 수 있었다.
자연스레 제왕 조용필에 필적할 유일한 맞수로 그가 떠오른 것은 대중적 잣대로나 음악적 평가 모두에 있어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영화 ‘고래사냥’ 출연과 10대 가수상 등 무려 15차례 이상의 수상 경력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솔로 활동 와중에도 국악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88년 발표한 ‘황천길’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국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본 솔로 1집의 풋풋한 총기(聰氣)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의 저편에서 활기찬 자태로 우리의 청(聽)감수성을 유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풍요로웠던 80년대의 일부를 자신의 지분으로 치환한 역사적인 명반이다. 동시에 김수철 음악 세계의 효시로서도 기능하며 그의 단독자적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처럼 아티스트의 개별성과 시대사적 맥락 모두에서 양가(兩價)적 성취를 굴착했기에 앨범을 향한 박수세례는 합당해 보인다. 보통 80년대가 음악적으로 다채로웠던 시절이었다고 사람들은 추억한다. 이 처녀작은 그 중심에 김수철이라는 작은 거인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대변하는 빛나는 주석이다.
〈 배순탁 | 웹진 IZM 필자 〉
1집 못다핀 꽃 한송이
앨범소개
Producer-김수철,최수일
Composer,Arrangement-김수철
Engineer-최전무
연주-작은거인
그룹 '작은거인'해체 이후 발표된 김수철의 첫 독집 앨범.
'못다핀 꽃 한송이'로 84년 KBS 최고가수상을 수상했다.
전위음악으로 10분 10초에 이르는 '별리'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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