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반]87위 이장혁 ‘이장혁 Vol.1’[한국명반]87위 이장혁 ‘이장혁 Vol.1’

Posted at 2010. 5. 30. 01:04 | Posted in 삶의한자락/미디어(영화,음악,TV)
기사입력 2008-07-03 17:56
ㆍ고립된 내면과 내면을 이어준 포크록

“내가 알던 형들은 하나 둘 날개를 접고/ 아니라던 곳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난 아직 고갤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했던/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어”(‘스무 살’). 피폐해진 주류 가요계와 달리 인디 신에서 좋은 음악들이 태어난 2004년, 대중에겐 생소한 이름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의 앨범이 발표된다. 그 안의 노래들은 그럴 듯하게 겉옷을 슬며시 쓰다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린 살갗을 아프게 어루만졌다. 내면에서 스며 나온 고백과 처연하면서도 포근한 포크 록의 음률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간을 돌려볼까. 로컬·인디 신이 형성된 1996년부터 활동하다가 2000년에 문을 닫은 ‘아무밴드’가 있었다. 그들은 단 한 장의 정규앨범 ‘이.판.을.사’(1998)만을 남겼지만 한국 인디역사의 명곡들 중 하나인 ‘사막의 왕’이라는 보석을 숨겨두었다. 이 밴드의 리더였던 이장혁이 얼마간의 은거 끝에 ‘스무 살’을 온라인을 통해 공개하고 ‘빵 컴필레이션 2: Lawn Star’(2003)에 ‘꿈을 꿔’로 참여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발표한 솔로앨범이 ‘이장혁 Vol.1’이다.

앨범의 입술을 여는 ‘누수’에서 ‘스무 살’로 이어지는 순간은 잔인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스무 살’은 사적인 기억의 토로이면서도 놀랍도록 보편적이다. 그것은 신호와 같기 때문이다. 혐오가 갈망으로, 때론 갈망이 혐오로 바뀌는 역전이 삶에 존재하며, 욕망의 끝은 대개 고통과 공허로 이어진다. “삶은 고통”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 이장혁은, 세상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지만 결국 자신을 겨누는 칼끝을 마주해야 하는 절망을 음악으로 써내려간다. 이러한 정서는 앨범과 곡 사이로 퍼져나간다. 차갑게 ‘동면’하며 ‘성에’ 낀 창 너머에서 ‘자폐’의 시선으로 갖게 되지만, ‘꿈을 꿔’가며, ‘칼’을 품기도 하고, ‘외출’을 시도하곤 한다. 경험의 양상만이 다를 뿐 모두 겪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의 노래가 태어난 ‘스무 살’의 ‘여관방’과 ‘영등포’와 같은 공간들도 듣는 이의 기억 속 공간으로 대치된다. 절절한 하모니카, 얼후와 가야금 등 다채로운 물감이 섞이면서도 일관된 음영을 그린 ‘이장혁 VOL.1’은, 고립된 내면과 내면이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음을 증언한다.

흙과 물의 냄새를 잃어버린 거대농장에서 찍어내듯 생산한 작물들이 넘쳐나고, 진실한 노래는 점점 귀해져가고 있다. 종종 실체 없는 근사함, 실험과 파격을 가장한 선정성이 이목을 교란하지만 결국 상업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절박함으로 악기를 잡을 수밖에 없는, “2000년대의 김현식”이란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창작자가 인디 신에 생존해 있음을 증명한다. 찢어지고 끊어진 망(網)을 다시 짜 연결시켜 이러한 음악이 전달된다면 진실한 소통의 길은 더 넓어질 수 있다. 오랜 시간 삭혀내어서인지 다소간의 욕심과 여백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둘 토해내고 있는 새로운 곡들은 이미 다음 앨범에 대한 믿음을 주고 있다. 작은 것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줄 아는 이 젊은 싱어송라이터는 지금도 창작을 계속하고 있다. ‘스무 살’에서 읊었듯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수상한 질서” 속에서.

<나도원 | 웹진 가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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