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개괄 (인도의 지리,역사,문화 등)인도 개괄 (인도의 지리,역사,문화 등)

Posted at 2012. 5. 24. 09:32 | Posted in 해외여행정보/인도,네팔,파키스탄

<인도 개황>

 

* 국명 : 인도 공화국 (The Republic of India)
*
위치 : 인도아 대륙 (동남아와 중동의 가운데 위치)
*
면적 : 328 7,263 Km2 (한반도의 15, 남한의 33, 세계7)
*
기후 : 열대 몬순(남부,해안), 온대(북부)
*
수도 : 뉴델리 (New Delhi, 1931 Calcuta에서 천도, 계획도시)
*
인구 : 11억명
*
주요도시 : Mumbai( Bombay, 서부)
                 Kolkata(
Calcuta, 동부)
                 Chennai(
Madras, 남동부)
                 Bangalore(
남중앙부)
*
민족(인종) : 공식어인 영어와 힌디어외 14 공용어 사용
*
종교 : 힌두(82.4%), 회교(11.7%), 기독교(2.3%), 시크교(2.0%), 불교(0.8%), 자이나교(0.4%), 기타(0.4%)
*
건국(독립) : 1947.08.15 (영국으로부터 독립)
*
정부형태 : 내각책임제
*
국가 원수 : Mr. A.B. Vajpayee (총리), Mr. Abdul Kalam (대통령)
*
입법부 : 양원제(상원 250, 하원 545)
*
정부성향 : 비동맹 원칙하에 러시아, 파키스탄 적대, 미국, 중국과는 비우호 관계

 

<Tamil Nadu 개황>

* 면적 : 13 58Km2 (남한의 1.3)
*
인구 : 63백만(인도 23개주 7번째)
*
기후 : 열대기후로 하절기는 28~40도씨, 동절기는 18~26도씨
*
연어 : 공용어인 영어와 Tamil 주로 사용
*
산업구조 : 농수산업(23.9%), 제조업(28.5%), 서비스업(47.6%) 

 

<일반정보>

* 한국과의 시차
  
한국보다 3시간 30 늦음

*
환전 환율
  
은행,공항,호텔에서 환전이 가능 일반적으로 은행에서의 환전이 호텔보다 환율이 유리.
  
미화 5천불 이상의 환전시 입국시 외화반입 신고 서류를 요청
  
환율 (2003.2.1 기준) : US$1=Rs 47,75 (1Rs=25.12)

*
전화
  
국제전화 : 서울 전화시 00-82-2(지역번호)-전화번호, 핸드폰 00-82-11/19(핸드폰 앞번호 0없이)-전화번호
  
공중전화 : PCO - 시내통화로 통화당 1.25루피
  STD (Subscriber Trunk Dialing) :
시외통화로 통화요금은 함께 프린트됨
  ISD (International Subscriber Dialing) :
국제통화로 통화요굼과 이용시간이 컴퓨터 프린팅

*
교통
  
교통수단 - 콜택시 : 시간거리 병산제, 오토리샤 : 삼륜차로 기본요금이 7루피이나 사전 요금 협의가 필요
  
신변안전을 위해 콜택시나 호텔택시를 권정하며, 오토릭샤의 경우 운전기사들과 영어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많고 사고의 위험이 있으므로 가급적 이용을 억제

 

* 주요 쇼핑센터
   Spencer Plaza (044-2852-3513)
특산품을 포함한 각종 수입제품 판매
   Life Style (044-2489-0008)
의류, 신발, 유아용품 판매
   Shopper's Stop (044-2820-6350)
가정용품, 수입의류 판매

 

* 관광 정보

 

    <박물관 (Government Museum)>


   
따밀나두 주정부 박물관
   1857
설립된 역사가 있는 박물관으로 지질학, 고고학, 인류학, 동물학,식물학 거축학적 의미가 있는 장소
   
관람시간 :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금요일 국경일은 휴관)

 

   마하발리쁘람(Mahabalipuram)
   
첸나이 시내에서 58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하발리는 "위대한 씨름" 쁘람은 "장소"라는 의미로  7세기     위대한 왕인Narasimhavarman 1세를 마하발리라 불렀으며, 그가 거처했던 지역. 고대 새원이 있으며,     강암에 조각한 동물형상궁전 등이 시대의 영화를 보여주는 장소.

 

    간디 기념관
첸나이 시내에서 40Km 거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간디가 암살당한 장소. 인도 위인인 Sri Ramanujar
     
기독교 성인인 Vaishn-avite 출생지.

 

<경제현황>

GDP : 9,062억불(06)

1인당 GDP : 780(06)

 

수출입 현황(07)

-수 출 : 1,555억불

-수 입 : 2,359억불

 

우리나라와의 관계

-1973.12. 외교관계 수립

-교역(07) : 112.2억불(수출 66억불, 수입 46.2억불)

-주요 수출품 : 무선통신기기, 선박 및 자동차 부품, 컴퓨터

-주요 수입품 : 석유제품, 천연섬유, 철광

-02 26억불, 03 40억불, 04 54억불, 05 67억불, 06 92억불

 

투자 및 업체진출 현황

-투자 : 13.9억불(08.3월말 현재 누계), 1,246

-진출업체 : 대우, 현대, 삼성, LG 345

-건설 수주 : 95 72억불(07.9월 현재)

-교민현황 : 7,000 (07)

 

입출국자 현황(07)

-인도인 한국방문 : 37,065

-한국인 인도방문: 36,625

 

북한과의 관계

73.12. 외교관계 수립

70년대 말까지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북한에 동정적

현재는 우리와의 관계 증진에 주력

 

주요 국내정세

-2004.4.20-5.10간 총선결과 야당인 Congress당 연합이 승리

-70년대 말까지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북한에 동정적

-2004.5 Congress당 주도 통일진보연맹(UPA) 정부 출범

-2007.7 프라티바 파틸 대통령 선출

-최근 미·인도 원자력 협력에 대한 연정내 좌파 정당의 반대로 연정 결속력 약화 소지

 

 

<경제현황>

GDP : 9,062억불(‘06)

1인당 GDP : 780(‘06)

 

수출입 현황(’07)

-수 출 : 1,555억불

-수 입 : 2,359억불

 

우리나라와의 관계

-1973.12. 외교관계 수립

-교역(‘07) : 112.2억불(수출 66억불, 수입 46.2억불)

-주요 수출품 : 무선통신기기, 선박 및 자동차 부품, 컴퓨터

-주요 수입품 : 석유제품, 천연섬유, 철광

-02 26억불, 03 40억불, 04 54억불, 05 67억불, 06 92억불

 

투자 및 업체진출 현황

-투자 : 13.9억불(08.3월말 현재 누계), 1,246

-진출업체 : 대우, 현대, 삼성, LG 345

-건설 수주 : 95 72억불(‘07.9월 현재)

-교민현황 : 7,000 (‘07)

 

입출국자 현황(’07)

-인도인 한국방문 : 37,065

-한국인 인도방문: 36,625

 

북한과의 관계

73.12. 외교관계 수립

70년대 말까지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북한에 동정적

현재는 우리와의 관계 증진에 주력

 

주요 국내정세

-2004.4.20-5.10간 총선결과 야당인 Congress당 연합이 승리

-70년대 말까지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북한에 동정적

-2004.5 Congress당 주도 통일진보연맹(UPA) 정부 출범

-2007.7 프라티바 파틸 대통령 선출

-최근 미·인도 원자력 협력에 대한 연정내 좌파 정당의 반대로 연정 결속력 약화 소지

 

 

인도 [India, 印度]아시아 국가

 

공식명칭 : 인도공화국(Republic of India)
인구 : 1,119,538,000
면적 : 3,166,414
수도 : 뉴델리
정체·의회형태 : 연방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총리
공식 언어 : 힌두어·영어
독립년월일 : 1947. 8. 15
화폐단위 : 인도루피(Indian rupee/Re, 복수형 Rs)
국가(國歌) : Jana-gana-mana("Thou art the ruler of the minds of all people")

남부 아시아에 있는 국가.

힌두어로는 Bhārat 또는 Bhāratavarsha(전설적 현인군주인 '바라트의 땅'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공식 이름은 인도 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다. 국토 면적이 세계에서 7번째로 넓고 인구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북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북동쪽으로는 중국· 네팔·부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며 북동부는 방글라데시를 3면으로 둘러싸고 있다. 남동쪽면은 벵골 만, 남서쪽면은 아라비아 해와 접한다. 남동쪽 앞바다에 섬 나라인 스리랑카가 있다. 면적은 3,166,414㎢이고, 인구는 1,198,003,000명(2009 추계)이며, 수도는 뉴델리이다. 인도는 매우 다양한 인종적 혈통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도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인도 대륙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 혹은 그 이후의 침입자들의 혈통이 뒤섞인 데서 기인한다. 공식 언어는 힌두어와 영어이고, 벵골어·카슈미르어·마라타어·우르두어 등이 포함된 다른 인도-유럽 언어들, 드라비다어, 그리고 수백 개의 다른 어군을 사용한다. 종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이다. 화폐단위는 루피(rupee/Re)이다.

 

 

인도는 지형적으로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인도 북부 국경을 따라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 지역, 갠지스를 포함하여 3개의 커다란 강의 작용으로 쌍인 토사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갠지스 평원, 데칸 고원으로 유명한 남부 지역이다. 주요농산물로는 쌀, 밀, 면화, 사탕수수, 코코넛, 향신료, 황마, 담배, 차, 커피, 고무가 있다. 제조업 분야에는 다양한 중공업과 고도의 기술 산업이 발전해 있다. 인도의 정치 형태는 양원제를 운영하는 공화국이다.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고, 행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다. 인도 지역에는 수 천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인도에서의 농업은 BC 7000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인더스 강 유역의 도시 문명은 BC 2600년경에 이루어졌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BC 6세기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베다교와 이를 계승한 힌두교에 의해 만들어진 카스트 기반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슬람교도의 침략은 대략 AD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1206년의 장기간 유지되었던 델리 술탄국을 설립하였고 1526년 무굴제국을 세웠다. 1498년에 인도를 향한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수 세기에 걸쳐 계속된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 간의 무역 경쟁을 가져왔다. 18~19세기에 걸친 영국의 지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로 이어졌고, 1858년 대영제국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모한다스 간디가 1947년에 영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이후,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네루,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 그의 손자인 라지브 간디가 몇 해를 제외하고는 1991년까지 계속 국가의 운명을 이끌었다. 인도 대륙은 2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는데, 힌두교가 대다수인 인도와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이 되었다. 후에 파키스탄과의 분쟁은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시크교도는 펀자브에 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인종과 종교적 갈등은 인도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서북쪽의 카시미르 지역은 끊임없는 긴장을 제공했다.

 

 

인도의 지형

 

남부 아시아에 있는 국가.

개요

 

지형적으로 인도는 크게 3지역으로 구분된다. 첫째, 인도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세계적인 고산지대인 히말라야 산맥지역이다. 이곳에는 해발 8,000m가 넘는 수십 개의 고봉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곳곳에 빙하와 설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둘째, 인도갠지스 평원으로 길이 2,400km, 너비 240~320km, 면적 100만㎢에 달하는 충적평야지대이다. 이곳에는 인더스·갠지스·브라마푸트라 강이 북쪽의 산악지역과 남쪽의 고원지역에서 많은 토사를 운반·퇴적시키면서 형성한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면서 평평한 저지대를 이루고 있다. 해안지역과 더불어 집약적인 농업이 행해지고 있는 인구밀집지역이기도 하다. 셋째,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질구조가 비교적 안정된 데칸 고원이다. 데칸 고원지역은 동고츠·서고츠 산맥 및 북쪽으로 뻗어 있는 빈디아 산맥, 삿푸라 산맥을 경계로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서고츠 산맥은 고원의 서쪽 끝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아라비아 해 사면과 벵골 만 사면의 분수계를 이룬다. 데칸 고원을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이 서고츠 산맥에서 발원하여 벵골 만으로 유입된다. 지질학적으로 인도의 위치는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으나 20세기 후반 판구조론이 유력해진 뒤 오늘날에는 초대륙 곤드와나에서 떨어져 나온 인도 반도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아시아 대륙과 충돌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형성하고, 이곳에서 발원하는 하천의 오랜 침식과 퇴적 작용으로 인도갠지스 평원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지역

해발 7,500m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은 세계 최고봉 10여 개가 있는 세계 최고의 산악지역이다. 해발 8,848m로 이 산맥을 굽어 보는 에베레스트 산이 네팔·티베트에 걸쳐 솟아 있다. 지질학상 가장 최근에 생성된 산지에 속하며 동서로 뻗은 산계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으로 중단 없이 2,500km 이상 뻗어 있다. 히말라야 산맥지역은 눈 덮인 봉우리, 거대한 빙하곡 위로 펼쳐진 빙원, 높이 솟은 절벽들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 깊은 하곡, 넓은 계곡 등 다양한 경관을 이루며 잠무카슈미르·히마찰프라데시 전역과 우타르프라데시·서벵골·아삼 주 북부지역에 걸쳐 있다. 히마찰프라데시의 쿨루·캉그라 계곡은 휴양지로 유명하다. 우타르프라데시에는 난다데비(7,817m)·라메트(7,756m)·트리술(7,120m) 등의 고봉이 솟아 있다. 세계적인 규모의 산악빙하를 포함하고 있는 이 지역은 극지방 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동토지대 중 가장 큰 지역으로 손꼽힌다. 설원지대가 서쪽 카슈미르로부터 동쪽 아삼까지 거의 4만㎢에 이른다(→ 색인 : 카슈미르 계곡). 세계 최대 규모의 빙하들이 히말라야 산계의 주요산맥인 대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발달해 있으며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녹아 북부인도의 여러 강들로 유입된다.

평야지역

인도에는 또한 100만㎢ 이상의 면적을 차지하는 거대한 평야지대가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북부 인도 갠지스 평원에 해당한다. 남부에도 상당한 규모로 삼각주가 존재한다. 이들 지역은 인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시되고 있다. 특히 여러 강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인구밀집지역이라 집중적으로 개발·경작되고 있다. 충적평야가 북부의 서벵골·비하르·우타르프라데시·하리아나·펀자브 주 대부분을 차지하고 아삼·라자스탄 주까지 펼쳐져 있다. 남쪽의 코모린 곶에서 마하나디 삼각주에까지 이르는 동해안 지역에는 인도 남부를 흐르는 여러 강들의 삼각주가 발달했다.

고원지대

인도반도를 이루고 있는 고원지대(데칸 고원)는 지질학적으로 인도의 지형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지형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고대(3억~5억 년 전)에 형성된 결정질 암석으로 이루어졌으며, 1967년 마하라슈트라 주의 코이나나가르 지진이 있기 전까지는 지진활동이 거의 없는 비교적 안정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지질학자들은 코이나나가르 지진이 서해안의 쿠치 습지로부터 남부의 코모린 곶까지 뻗어 있는 말라바르 단층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데칸 고원은 북쪽의 빈디아 산맥을 사이에 두고 인도갠지스 평원과 이웃한다. 그밖에도 아라발리·삿푸라·마이칼라·아잔타 산맥이 뻗어 있으며 동쪽으로 평균 고도 600m의 동고츠 산맥을 끼고 있다. 아라비아 해와 서고츠 산맥 사이로 좁은 해안지대가 남북으로 펼쳐지며 벵골 만과 동고츠 산맥 사이에는 보다 넓은 해안지대가 있다. 고원 남부 끝에서는 동고츠 산맥과 서고츠 산맥이 만나 닐기리 구릉지대를 이룬다. 고원지대는 인도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발견된다. 널리 알려진 카슈미르히말라야 산맥 북동부에 자리잡은 라다크 고원은 평균 고도 5,220m를 자랑한다. 이 고원은 인도 최고의 고원지대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지역이기도 하다. 동서로 라다크 고원지대를 가르며 뻗어 있는 창첸모 산맥 북쪽에는 창첸모 강이 서쪽으로 흘러 바닥이 평평한 계곡지대로 접어든다.

인도양에 있는 몇 개의 군도들이 행정상으로 인도에 속한다. 연방직할주인 락샤드위프 제도는 아라비아 해 및 말라바르 해안 서쪽에 분포한 작은 산호섬 군(群)이다. 동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에 안다만니코바르 제도가 상당히 크고 높게 솟아 있어 벵골 만과 안다만 해를 갈라놓고 있다. 연방직할주인 안다만 제도는 본토보다는 미얀마와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며 니코바르 제도 역시 인도네시아와 더 가깝다.

 

 

인도의 수계

지하수

인도의 지하수는 크게 3개 유역으로 분류된다. 그중 갠지스 강 유역이 가장 크며 북서부 루디아나에서 암리차르까지 펼쳐져 있는 펀자브 충적지대와, 라자스탄 일부를 지나 남쪽으로 아마다바드까지 구자라트 평원지대를 향해 뻗은 서부저지대가 그 뒤를 잇는다. 인도는 지형이 평평한 데다가 대부분 지역의 기반구조가 몬순 계절에 내린 많은 강수량을 저장하는 데 적절하지 못해 이들 지역을 흐르는 지하수량이 충분하지 않은 편이다.

 

히말라야 산기슭의 투수성 사암지대에서는 자분정(自噴井) 지역이 발견된다. 나르마다 강 유역을 따라 반도 북서부의 삿푸라 산맥 북쪽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자분정 지역이 발견되는데 이곳에는 물을 품고 있는 역암지층 위로 불투수층인 결정질 바위 능선이 자리잡고 있다. 물을 포함한 대수층(帶水層)은 또한 반도 서부의 마하라슈트라 용암대지와 인도 극서부에 있는 구자라트의 자분정 지역 일부에서도 발견된다. 지표수와 마찬가지로 지하수 역시 투수성 암석들이 있는 구릉지대에 나타난다. 메갈라야 주 동(東)카시힐스 행정구에 있는 체라푼지 근처와 우타르프라데시의 데라둔 근처가 이에 해당하는 지역들이다. 마디아프라데시의 람가르 구릉지대에는 사암이 깎여 나가 형성된 자연동굴이 있으며 동부 메갈라야 남쪽 가장자리의 석회암지대를 따라서는 돌리네와 막다른 계곡들이 흔히 발견된다.

 

지하수가 샘이나 시내를 이루며 지표 위로 나타나는 현상은 주로 우타르프라데시의 쿠마운히말라야 산맥, 비하르 남부의 낮은 구릉지대와 고지대, 콘칸 지방의 서고츠 산맥 기슭 등 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땅 위로 솟는 지하수 가운데 극히 일부가 온천이고 온천 중에는 유황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도 있다.

 

호수는 국토의 규모에 견주어 매우 적은 편이다. 히말라야 산맥 일대에 위치한 호수 대부분은 빙하에 의해 움푹 팬 지형 또는 빙퇴석(氷堆石)으로 막힌 지형에 물이 고이면서 형성되었다. 때에 따라 30~260㎢로 그 규모가 변하는 울라르 호가 카슈미르 계곡 일대에서 가장 크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화구호(火口湖)로는 데칸 고원 마하라슈트라 주 불다나 행정구에 있는 로나르 호가 유명하다. 라자스탄 주 중동부에 있는 삼바르 염호는 인도 최대의 염호로 손꼽힌다. 해안평야 지대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적인 경관이 펼쳐진다. 바로 콘칸 해안의 뭄바이 항에서 역수(逆水)에 의해 물이 막혀 정체되어 있는 현상이다. 이 지점 남쪽으로는 아스타무디 호가 자리잡고 있다.

지표수

인도의 하천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하는 것과 데칸 고원에서 발원하는 것, 동고츠·서고츠 산맥에서 곧바로 바다로 흘러드는 것, 내륙 유역 분지로 유입되는 것 등 크게 4개 수계로 구분된다. 총유수량은 1년에 1조 6,800억㎥에 이른다. 인도 갠지스 평원인더스 강의 동쪽 지류들과 갠지스 강 및 그 지류, 브라마푸트라 강이 운반해 온 퇴적물들로 형성되었으며, 동해안 삼각주들은 마하나디·고다바리·크리슈나·코베리 강의 퇴적 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인도의 3대 주요분수계는 북쪽의 히말라야 산맥, 중부의 빈디아·삿푸라·마이칼라 산맥, 데칸 고원에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의 유로를 결정하는 서고츠 산맥이다. 히말라야 수계는 비뿐만 아니라 눈이 녹아서도 흐르기 때문에 연중 유량 변동이 적은 편이지만 데칸 수계의 하천은 유량 변동이 매우 심해 건기에는 대부분 조그만 실개천이 된다. 해안 수계의 하천은 길이가 짧고 유역 면적도 한정되어 있다. 내륙 수계인 서부의 라자스탄 주에서는 하천이 대부분 염호로 흐르거나 사막의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 중간에 수로가 사라진다. 하천별 유역 면적을 보면 갠지스 강이 총 면적의 약 25%, 고다바리 강이 약 10%를 차지하며, 브라마푸트라 강과 인더스 강이 그 다음을 잇는다. 그밖에 크리슈나 강, 마하나디 강, 나르마다 강, 코베리 강의 순이다.

호수

큰 면적의 국가이지만 자연 호수는 거의 없다. 히말라야에 있는 대부분의 호수는 빙하가 지반을 파내거나 일정 범위를 흙과 돌로 막아서 형성된 것이다. 잠무카슈미르에 있는 울라르 호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질구조의 침하로 생겨났다. 호수 면적이 유동적이기는 하나 울라르 호는 인도에서 가장 큰 담수호이다.

 

 

인도의 자연환경

토양

인도에는 충적토·사막토·산악토·흑색토·적색토·라테라이트토·저습지토 등 실제로 거의 모든 유형의 토양이 존재한다. 충적토는 히마찰프라데시·델리·잠무카슈미르 등의 일부 북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주에서 발견되며 특히 케랄라·안드라프라데시·카르나타카·구자라트·서벵골·타밀나두 등 해안에 면한 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삼·마디아프라데시 주에서도 충적토가 발견된다. 안드라프라데시·마하라슈트라·마니푸르 주에는 일명 레구르라고도 하는 현무암질의 비옥한 흑토가 분포한다. 이 토양은 자양분이 풍부하고 보습력이 뛰어나 목화 재배에 적당하다. 안드라프라데시·타밀나두 주에는 적색토가 풍부하고 케랄라·타밀나두·마하라슈트라·서벵골 주에는 라테라이트토가 분포한다. 라자스탄 주는 대부분 사막토로 덮여 있으며 케랄라 주 동부 지대와 비하르 주 중앙부에서는 산악토가 발견된다. 케랄라 주와 비하르 주에서는 저습지가 나타난다.

기후

인도의 기후는 대체로 열대계절풍의 영향을 받는다(→ 색인 : 열대 몬순 기후). 계절풍은 6~9월에 습윤한 남서풍이, 12~2월에는 건조한 북동풍이 분다. 이에 따라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교차되고 1년은 크게 다음의 3계절로 구분된다.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하고 온화하면서도 때로는 한랭한 11~2월의 건조한랭기, 기온은 매우 높으나 강수량이 적은 3~6월경의 건조혹서기, 남서계절풍이 불어와 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도 높아서 매우 무더운 6월경부터 10월까지의 습윤고온기이다. 그러나 지형과 몬순(남서계절풍)의 도래 시기에 따라 지역간에 기온·강수량·강수일수 등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평균강수량이나 평균기온을 살펴보는 것은 무의미하고 각 지역별로 강수량과 기온을 살펴보아야 한다. 몬순은 남쪽의 인도양에서 북동쪽을 향해 인도에 내습, 5월말에서 6월초에 걸쳐 인도 남서쪽에 비를 내리게 한다. 이 비는 서고츠 산맥과 서해안 지대에 집중돼, 인도에서는 이 지역들이 최다우지로 손꼽힌다. 이후 몬순은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북동쪽으로 전진하나 동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은 적어진다(→ 색인 : 비그늘). 아라칸 산맥에 비를 뿌리며 벵골 만을 향해 북상한 몬순은 벵골에 상륙, 실롱 구릉에 부딪치면서 방향을 바꾸어 갠지스 평원을 거쳐 북서쪽으로 향한다. 연강수량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몬순의 도래로 인도는 10월까지 4개월간 우기가 계속된다. 몬순의 도래시기와 강수량은 농사의 풍흉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커다란 국가적 관심사이다.

 

인도는 강수량에 따라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서부의 아삼·메갈라야 주 및 뭄바이에서 트리반드룸에 이르는 서해안지역은 최다우지로 꼽힌다. 메갈라야 주의 체라푼지는 연평균강수량 1만 1,430㎜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다우지이다. 이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북서부 쿠치까지 뻗어 있는 라자스탄 사막 지역과 서쪽으로 길기트까지 뻗어 있는 카슈미르의 라다크 고원 일대는 과우지(寡雨地)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 속하는 타르 사막에서는 연평균강수량이 100㎜에 불과하다. 극단적으로 강수량 차이를 보이는 이 두 지역 사이에는 비교적 강수량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존재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동부 데칸 고원 쪽은 대략 연평균강수량이 1,500㎜ 정도이고 펀자브 평원에서 서부 데칸 고원에 이르는 지역은 750㎜ 정도이다. 그러나 서고츠 산맥 서사면 지역은 남서계절풍의 영향으로 4,000㎜ 이상의 강수량을 보인다.

 

인도에서는 기온도 강수량만큼이나 지역차가 크다. 연평균기온이 히말라야 산악지대의 다르질링·심라 같은 여름 관청 주재지에서는 12~14℃로 비교적 낮은 반면 인도갠지스 평원에 있는 델리와 알라하바드에서는 26℃,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있는 데라둔에서는 22℃, 인도 최고 혹서지인 타밀나두 주의 팔라얀코타이에서는 29.5℃에 달한다. 해안지대의 경우에는 서해안의 뭄바이가 28℃, 동해안의 첸나이가 29℃를 기록한다. 이와 같이 넓은 인도 대륙은 기후가 다양하게 분포되기 때문에 인도의 기후를 말할 때는 전국 평균보다는 지역적으로 산출한 평균기온 등을 산출하는 것이 보다 편리한 경우가 많다.

식생

남북간 위도차가 크고 전체적으로 기후 변화의 폭도 크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식생이 나타난다. 서고츠 산맥 서쪽의 해안지역에는 열대 식생이 풍부하다. 이곳에서는 열대상품작물의 재배가 활발한데 저지에서는 코코넛·빈랑·후추·생강·고무·바나나 등이, 고지에서는 커피·차·소두구 등이 주로 재배된다. 북서부 인더스 강 유역의 펀자브·라자스탄·구자라트 주에는 기후가 건조하여 식생이 거의 없는 반면, 갠지스 강 유역에는 살나무를 중심으로 매우 다양한 삼림이 분포한다. 이 삼림지대에는 자단이나 티크 같은 경목이 풍부하며 수많은 종류의 연목과 대나무도 자란다. 브라마푸트라 강 유역에도 키 큰 풀과 활엽수림, 대나무숲이 무성하다. 야자나무는 건조한 데칸 고원의 특산물이다. 동부 히말라야에서는 20종의 야자, 4,000여 종의 화초, 월계수·단풍나무·오리나무·자작나무·소나무·진달래·대나무 등이 자란다. 서부 히말라야에서는 고도에 따라 식생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고지에서는 전나무·자작나무·노간주나무 등이, 중간지대에서는 히말라야삼나무·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저지에서는 살나무가 많이 발견된다.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는 주로 맹그로브·너도밤나무 등이 자란다. 인도에서 주로 재배되는 작물은 벼·밀·콩·옥수수이고, 과일은 망고·코코넛·빈랑·감귤류 등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계곡지대에서는 사과·복숭아·배·살구·호두, 남부에서는 차·커피·소두구·후추·고무 등이 집약적으로 재배된다. 키니네는 습지대에서 재배된다.

동물

 

인도에는 호랑이·표범·치타 같은 맹수들을 포함하여 많은 종류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호랑이와 표범은 히말라야 산맥을 포함한 인도 전역의 초원·늪지·삼림에서 볼 수 있으나 날쌔기로 유명한 치타는 사실상 멸종되었다. 사자도 한때는 북부 인도 전역에 걸쳐 살았으나 지금은 국립공원에서만 볼 수 있다. 역시 멸종될 위기에 처해 있는 커다란 인도산 외코뿔소는 아삼 주에 있는 보호구역에 400여 마리가 살고 있을 뿐이다. 코끼리는 오리사 주에 많으며 서고츠 산맥의 정글이나 타밀나두 주 북서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코끼리는 접근이 어려운 산림지역에서 목재를 운반하거나 행사시 행진을 하는 데 이용된다. 자태가 아름다운 인도 들소는 현재 타밀나두 주의 보호구역에, 야생 염소는 히말라야에, 야생 야크는 최북단 라다크의 고지대에 산다.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곰과 판다·담비·족제비·수달·사향고양이·줄무늬하이에나·늑대·재칼·살쾡이·스라소니·몽구스·사슴·영양·염소·양 등이 인도의 여러 지역에 걸쳐 서식하고 가축으로 소·들소·양·염소·말·노새·당나귀·낙타 등이 사육되고 있다.

 

인도에는 400종에 이르는 뱀이 서식하고 있다. 길이가 4m가 넘는 코브라는 일반코브라와 킹코브라류로 나뉜다. 그중에서 우산코브라류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밖에 살모사류 20여 종과 여러가지 일반 뱀류가 발견되며, 3종의 악어와 50여 종의 거북이 서식한다. 조류로는 독수리·매·물수리·펠리컨(사다새)·가마우지·군함조·물총새·왜가리·도요새·꿩·뇌조·앵무새·구관조·공작 등 약 1,200종에 달하는 새들이 있는데 아종까지 합하면 약 2,000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 텃새가 약 1,750여 종을 차지한다. 특히 휘황찬란한 깃털을 가진 공작은 인도의 국조로 보호받고 있다.

환경보전

산림·야생생물 보호운동이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보호해야 할 종의 동물들을 입법부에서 법안으로 공표하여, 다양한 식물군상이 풍부한 지역은 보호생물권으로 지정해 관리한다. 사실상 개인 소유의 산림은 남아있지 않다. 생태학적으로 피해를 입힐 우려가 있는 계획은 환경삼림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런 법안에도 불구하고 산림·사바나·목초지의 면적이 줄어들고 있어서 동물의 개체수가 19세기 말의 수준으로 회복될 가망이 거의 없다(→ 색인 : 자연보존).

 

 

인도의 정착유형

개요

 

인도는 인종과 언어집단의 다양성을 반영하듯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많은 전통적인 구역들로 나누어진다. 부족 또는 자연환경의 차이로 인해 자연발생적으로 별개의 지역을 형성한 후 시대를 두고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발전시켜온 이 전통지역들은 독립 이후 인도의 행정구역, 특히 주들이 이러한 민족언어집단이나 전통적인 구역의 경계를 따라 설치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인도 국민의 3/4가량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으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심지역으로의 이주현상이 증가하고 있다. 3,000개 이상의 도시와 60만 개 이상의 촌락이 존재하며 콜카타, 뭄바이 대도시권, 델리 대도시권, 첸나이, 방갈로르, 아마다바드, 하이데라바드, 칸푸르, 푸네, 나그푸르 등 몇몇 도시는 1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거대도시권을 형성한다.

히말라야 산맥지방

히말라야 산맥지방은 카슈미르 주 길기트 근처에서 크게 굽이치는 인더스 강 줄기와 상(上)아삼에 있는 브라마푸트라 강의 큰 굽이 사이에 뻗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신들의 처소'로 알려졌던 히말라야 산맥은 아리아와 몽골이라는 서로 다른 두 문화와 문명의 합류지이며, 히말라야 산계의 다울라다르 산맥 기슭에 있는 히마찰프라데시의 쿨루·캉그라 계곡은 힌두교와 불교의 합류지이다. 아루나찰프라데시 주(옛 이름은 북동변경주)에서는 불교·힌두교·애니미즘이 함께 나타난다.

 

인도 북쪽 끝에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로지르는 라다크 고원(평균고도 5,700m)이 카슈미르히말라야 산맥 북동부를 차지하고 있다. 설선 밑에 위치한 이곳은 기복이 심한 황무지로 곳곳에 깊은 계곡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식생이 드물고 하천이 간간이 나타난다. 건조지역이어서 고지대사막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주민은 티베트인이며 불교를 신봉한다. 9만 8,400㎢에 달하는 이 지역에는 진흙으로 지은 집들과 여러 층으로 올린 불교사원, 돌과 벽돌을 이용해 지은 집들로 이루어진 촌락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라다크가 속한 잠무카슈미르 주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각각 일부분을 점유하고 영유권을 주장하는 지역으로 지형·인종·종교 등에 따라 3부분으로 나뉜다. 북부에는 티베트 또는 반(半)티베트 지역으로 분류되는 라다크와 길기트가, 남부에는 넓고 평평한 지형인 잠무 지역이 있다. 길기트는 1948년 이후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었으며 잠무 지역에는 힌두교를 신봉하는 도그라족이 거주한다. 이들 지역의 중간에는 주민의 80% 이상이 이슬람교도인 카슈미르 계곡이 있다. 전통지역으로서의 잠무카슈미르는 히말라야 산맥과 인도갠지스 평원 사이에 낀 중간지대로서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곳으로 불교·힌두교·이슬람교 등 서로 다른 세 종교와 여기에서 파생된 문화유산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불교 사원들은 대부분 라다크 행정구 동부에 자리잡고 있다.

 

히말라야 지역의 또다른 전통지역은 니시족·아파타니족·미슈미족·몬파족·탕사족·완초족 등 다양한 인도몽골계 부족들이 거주하는 아루나찰프라데시이다. 면적 약 8만 3,000㎢에 걸쳐 있는 이 지역은 서쪽으로 부탄, 북쪽으로 중국의 티베트 및 신장 지역, 남쪽으로 아삼과 나갈란드, 남쪽과 동쪽으로 미얀마와 이웃한다.

 

우기에는 급류로 변하는 수많은 하천들이 가로지르고 있어 거의 모든 주민들이 습기를 피하기 위해 땅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거처를 마련한다.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주민들은 혈연관계는 없지만 같은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같은 생활방식을 택하고 있다. 각 부족들은 동족결혼을 원칙으로 하되 씨족 단위로 나누어 같은 씨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일처다부제가 일반적이지만 갈롱족이나 북쪽 끝지방의 티베트 영향권에 있는 변방 부족들간에는 일처다부제가 발견되기도 한다. 여러 세기 동안 환경이 이들 부족들의 생활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일부 부족들은 자연력을 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와 힌두교는 이들 사이에 거의 퍼져 있지 않으며 티베트·미얀마 불교 또한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인도갠지스 지방

 

히말라야 산맥지방과 마찬가지로 인도갠지스 평원에도 서로 다른 인종적·종교적·지역적 배경을 가진 여러 전통지역들이 존재한다. 인도 갠지스 평원 중심부에 자리잡은 펀자브 지방은 예로부터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주민들 사이에 시크교도들이 끼어 있는 복잡한 인구분포를 나타냈다. 1947년 독립 후 시크교도·힌두교도 지역인 동(東)펀자브와 이슬람교도 지역인 서(西)펀자브로 나뉘었는데 서펀자브는 이후 파키스탄에 편입되었다. 1966년 이후 동펀자브는 시크교도 거주지역이 대부분인 펀자브 주와 대부분이 힌두교도인 하리아나 주로 다시 나누어졌다. 펀자브는 전통적으로 종교의 한 계파가 별개의 민족으로 발전한 시크교도들의 본거지였던 지역이다. 강건한 체격을 가진 시크교도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군사로 나섰다. 시크교도가 장악하고 있는 펀자브 지방은 약 5만 375㎢에 이른다.

 

펀자브 서쪽으로는 많은 부분이 사막지대로 이루어진 라자스탄 지방이 펼쳐진다. 라지푸트 씨족집단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곳은 초기 이슬람교도의 침입시 강력히 저항했던 계층인 라지푸트 계급 때문에 인도역사에서 힌두 전사계급과 문화의 요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라지푸트의 행동규범은 고대 힌두 서사시에 등장하는 여러 영웅들에게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은 귀족 출신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라자스탄은 주로 우다이푸르·자이푸르·조드푸르·비카네르·자이살메르 등 중세 라지푸타나 왕국들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 34만 1,900㎢이며,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다양한 라자스탄 방언과 힌디어이다. 독립 후 자와할랄 네루,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인디라 간디 등 인도의 정치지도자들은 주로 우타르프라데시라는 면적 29만 2,700㎢의 거대한 주에서 배출되었다. 야무나 강에서 비하르까지 펼쳐 있는 이 지역은 전설 속에 전해오는 전통 힌두 문화의 고대 중심지였으며 오늘날까지 현대 힌두 문화의 심장부로 남아 있다. 우타르프라데시는 마투라·바라나시(바나라스·베나레스) 등의 성도(聖都)를 포함하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보수적인 힌두교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바라나시는 여러 신전들로 유명하다. 이 지방의 주요 언어인 힌디어는 국어로 지정되어 있다.

 

우타르프라데시 동쪽 비하르 너머에는 전통지역 벵골이 자리잡고 있다. 벵골인들 중에는 걸출한 문인·예술가·철학자·종교인·정치인 등이 상당수 있다.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스와미('신학교사'라는 뜻) 비베카난다, 슈리 오로빈도 등이 벵골 출신이다. 벵골인들은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 공히 같은 언어를 쓰며 도심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생활한다. 벵골은 예로부터 앞에서 주름을 잡아 뒤에서 고정시킨 도티(dhoti)라고 하는 흰 면 허리감개로 유명했다. 정치적으로는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의 근거지로서 이의 인도판 변형이랄 수 있는 낙살라이트 운동이 이곳의 낙살바리에서 시작되어 폭동과 정치인 암살, 파업 등이 계속되기도 했다.

나갈란드·마니푸르·트리푸라

인도 동부 브라마푸트라 강 유역과 상(上)미얀마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나갈란드나가족이 거주하는 전통지역이다. 나가족은 시조가 다르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심지어는 생긴 모습까지도 다른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하나의 인구집단으로 취급된다. 한때 머리사냥풍습으로 악명 높았던 이들은 오늘날 상당수가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했고 티베트미얀마어계에 속하는 다양한 방언을 쓴다. 거주지인 변경 산악지대의 면적은 1만 6,600㎢이다. 나갈란드 남쪽의 마니푸르와 아삼 및 미조람 서쪽에 있는 트리푸라는 동부에 있는 또다른 전통지역으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두 지역 주민 모두 몽골 계통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니푸르인들은 쿠키친계의 언어를 사용한다.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무역업에 종사한다. 주민들은 대부분 힌두교를 신봉한다. 마니푸르 춤이라는 대중예술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일설에 의하면 운동경기인 폴로가 이곳에서 영국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트리푸라는 한때 미얀마의 아라칸 지역에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구자라트·마하라슈트라

인도 서부에는 구자라트족과 마라타족이 거주하는 2개의 전통지역이 존재한다. 구자라트는 쿠치 습지 및 아라발리 구릉지대로부터 다망강가 강까지 19만 4,250㎢에 걸쳐 펼쳐 있으며 주 북동부까지 뻗어 있는 구릉지대와 쿠치·사우라슈트라를 포함한다. 힌두교도·이슬람교도·자이나교도 모두 구자라트어를 사용한다. 1960년까지 봄베이 주(지금의 마하라슈트라)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언어분포를 따라 별개의 주로 독립했다. 구자라트인들은 국내외적으로 기업가적 재질을 가진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든 생물은 신성불가침성을 가진 존재라는 신념을 비롯해 자이나교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하트마 간디도 구자라트인으로 그의 비폭력 원칙은 동향인인 이곳 주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으로 전달되었다. 인도 반도의 주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하라슈트라는 서쪽으로 아라비아 해와 닿아 있으며 30만 8,200㎢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언어는 마라타어를 사용한다. 체격이 작은 마라타족은 예로부터 서부 구릉지대에 거주해왔다. 마라타족은 17세기에 무굴 제국 침략군들에게 저항한 것을 비롯해 시크교도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영국 통치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들은 거의 300년 가량 인도 서부를 지배해왔다는 자부심과 충성심이 상당히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브라만 계급에서 많은 학자와 역사가·판관·변호사 등을 배출해왔다.

고아

파나지를 중심으로 한 고아 또한 하나의 전통지역으로 구분된다. 마하라슈트라의 콘칸 해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1961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도의 가톨릭교 중심지로 남아 있다. 이곳의 가톨릭교도들은 종교의 동질성 때문에 포르투갈 문화의 영향이 강한 독특한 사회를 형성했다. 힌두교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포르투갈의 정치적 후원으로 이 지역에서 가톨릭은 특별한 위치에 있다.

드라비다족 거주지역

인도 남부는 타밀족·안드라족·칸나다족·말라얄리족 등 여러 드라비다족 거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처다부제나 모계사회제도 등 인도 북부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풍습이 남아 있다. 크샤트리아(전사)와 바이샤(상인) 계급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등 카스트 제도가 변형된 형태로 존속한다. 타밀족은 이들 드라비다계 종족들 중 가장 오랜 문화전통을 자랑한다. 타밀어는 가장 오래된 주요 드라비다계 언어이며, '드라비다'와 '타밀'이라는 말은 같은 뜻을 내포한다. 타밀족은 인도 반도 남동쪽 끝에 있는 타밀나두 주에 거주한다. 안드라족은 고대에서부터 안드라프라데시 지역에 거주하면서 드라비다어족의 4개 문어 중 하나인 텔루구어를 발전시켜왔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드라비다족과 아리아족의 혼혈종족이다. 대다수가 힌두교를 신봉하지만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도 상당수 존재한다. 안드라족의 문화유산은 미술·건축·음악·무용·문학 부문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쿠치푸디(Kuchipudy) 무용양식은 인도 고전무용 중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림자 연극이나 꼭두각시 놀이가 인도 극예술의 초기형태로 남아 있다. 카르나티크 음악의 키르타나(Kirtana) 양식이 남인도 음악의 대작곡자 중 한 사람인 티아가라자(1764~1846)에 의해 발전되었다.

 

인도 남서해안의 카르나타카(고대에는 '흑토지대'를 뜻하는 '카르나드'라고 불렸음) 주에는 마우리아 왕조(BC 3세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칸나다족이 거주하고 있다. 칸나다족은 드라비다계 종족에 속하지만 여러 세기 동안 아리아인과 혼혈되어왔다. 주요종교는 힌두교이나 한때 번성했던 자이나교와 불교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칸나다 문학은 자이나교·브라만교 작가들 및 비라사이바(링가야트라고도 함)파(派) 작가들에 의해서 풍부하게 발전했다. 주로 〈푸라나〉(힌두교의 경전) 또는 반(半)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주제로 공연되는 〈약샤가나 Yakṣagāna〉라는 뮤지컬이 17세기경 이 지역에서 발전되었다. 칸나다족에게서 이름을 빌려온 카르나티크 음악은 고대 힌두 문화에서 진화하여 오늘날 북부인도의 힌두스탄 음악과 대비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경관이 뛰어난 케랄라 주에 거주하는 말라얄리족은 힌두교를 신봉하는 나야르족과 시리아계 그리스도교도 사회로 이루어져 있다. 케랄라 주(옛 이름은 말라바르)는 트라방코르·코친 왕국이 합쳐지면서 나타났으며 말라얄람어라는 공통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게 되었다. 다양한 여러 사회집단 가운데 시리아계 그리스도교도 사회와 흑인 및 백인으로 이루어진 유대인 사회가 독특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교도 사회가 서해안을 따라 말라바르 전체에 넓게 퍼져 있는 반면 유대인 사회는 코친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사회는 이슬람교도인 모플라족이다. 아랍 상인들의 후예인 이들은 서해안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전통지역으로서 케랄라는 몇몇 독특한 사회현상을 보인다. 모계사회의 영향이 여러 방면에 현저하게 나타나 이 지역 여성들은 인도의 다른 지역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퐁디셰리

인도 동부의 퐁디셰리는 프랑스와의 긴밀한 관계로 인도의 나머지 지역과 약간 다른 독특한 특성을 나타낸다. 프랑스가 건설한 후 네덜란드와 영국의 손을 거쳐 1816년 프랑스에 의해 재점령되었으며 1954년 인도에 넘어가 1963년 인도 영토로 정식 편입되었다. 독립 전의 외국세력과 독립 이후 인도 문화에서 받은 영향으로 여러 문화가 혼합된 양상을 보이지만 고아 지방에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크게 남아 있는 것처럼 아직까지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인도의 국민

민족언어집단

인도의 주민구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계속되어온 침입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인도는 다양한 이주민들의 최종 정착지 구실을 했으며 이곳에 정착한 이들 이주민들이 계속 뒤섞인 결과 오늘날 백인종·황인종·흑인종·오스트랄로이드를 망라하는 복잡한 인구집단이 출현했다. 따라서 인종적 특성보다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인도 주민들을 구분할 수 있는 1차적인 지표가 된다. 그러나 언어 역시 매우 복잡하다. 공식적으로는 인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아삼어·벵골어·구자라트어·힌디어·칸나다어·카슈미르어·말라얄람어·마라타어·오리야어·펀자브어·산스크리트·신드어·타밀어·텔루구어·우르두어 등 15개 주요지방어로 구분하고 있으나, 더 세분하면 1,652종에 달하는 언어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인도의 언어는 크게 4개의 어군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큰 어족은 대다수 주민이 사용하는 드라비다어족과 인도이란어족이며 그밖에 소수 어족으로 오스트로아시아어족과 시노티베트어족이 있다. 오스트로아시아어는 중부와 동부 인도의 고산지역 및 산림지역에서 사용되고 시노티베트어는 북동부 국경지대에서만 쓰인다. 오랜 기간 동안 이들 어족 사이에 상호 차용(借用)이 많이 있었지만 각 어족의 개별적인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은 오리사 주 경계부터 코모린 곶까지 인도의 동부와 남부에 걸쳐 사용된다. 그중 가장 오래된 타밀어는 주로 타밀나두 주에서, 텔루구어는 안드라프라데시 주에서, 드라비다어 중 가장 늦게 생겼으나 가장 빠르게 성장한 말라얄람어는 케랄라 주에서, 칸나다어는 카르나타카 주에서 주로 사용된다. 인도이란어족의 언어들은 그리스어·라틴어·게르만어·슬라브어 등과 함께 인도유럽어족에 포함된다. 이들 언어는 4,000년 전 침입자들에 의해 인도로 전해졌으며, 그 원형은 인도의 고전 언어인 산스크리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스크리트에서 발전된 여러 파생언어가 프라크리트이며 그중 가장 오래 된 것이 팔리어이다. 팔리어는 현재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석가모니가 산스크리트를 사용하는 브라만 계급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일반 대중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사용했던 언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파생어가 출현함에 따라 산스크리트와 팔리어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다.

 

 

인도의 언어는 6, 7세기경 인도의 북부와 서부에서 빈발한 인구 이동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주민들이 대부분 정착한 10세기경에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인도이란어족의 언어들 중 가장 많이 쓰이는 힌디어는 야무나 강부터 비하르 주에 걸쳐 쓰였던 프라크리트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 이슬람교도가 침입한 13세기부터 북부 인도에서는 페르시아어가 공식언어로 사용되었다. 이슬람교도의 유입은 혼성언어의 발생을 촉진시켰는데 단적인 예로 델리 주변에서 발생한 힌두스탄어는 현재 북부 인도 이외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바로 이 힌두스탄어에서 힌디어우르두어가 출현했다. 우르두어는 13세기에 발생하여 무굴 제국 시기인 18세기에 문어로 발전했고 고급 힌디어로 쓰인 힌디 문학 역시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외에도 인도아리아어에는 벵골어·펀자브어·구자라트어·마라타어·아삼어·오리야어 등 많은 파생어가 있으며 파하리어·히말리야·네팔어·카슈미르어·시나어 등 히말라아 방언들도 인도아리아어족에 속한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북부 인도에서 현재 사용되는 인도아리아들은 모두 산스크리트와 관련이 있다.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언어들은 주로 하층민들에 의해 사용된다. 문다어와 콜라르어가 이에 속하며 오늘날 주로 동부와 중부 인도 및 북부 벵골과 아삼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케르와리어·산탈어·문다리어도 포함된다. 시노티베트어 계통의 언어는 타이어와 중국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변경의 소수 부족들에 의해 사용된다. 이들은 원래 문자가 없었으나 18세기 중엽부터 벵골 문자를 채택, 사용하고 있다. 인도 북동부에서는 캄티어·마니푸르어·메이테이어 등이 사용되고 네팔 동부, 시킴, 다르질링에서는 렙차어가 사용된다. 이밖에도 인도에는 안다만어·니코바르어 등 수많은 소수언어가 존재한다.

 

영어는 15개 주요언어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인도 주민의 언어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 19세기 영국의 인도 정복과 함께 도입된 영어는 남쪽의 드라비다어권, 북쪽의 힌디어권 전부에서 쓰이는 유일한 공통어이다. 1950년에 제정된 인도 헌법에는 힌디어와 데바나가리 문자, 아라비아 숫자를 공통으로 사용하되 1965년까지는 한시적으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그 이후에는 영어를 힌디어로 대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어 사용 포기에 대한 남부 드라비다어권의 반대로 영어를 무기한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법규가 개정되었다. 1967년 공용어에 관한 수정 법령에 의하면 국가 공무원 채용시 반드시 힌디어와 영어 모두를 알아야만 하도록 규정했다. 대법원·고등법원·연방정부와, 힌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주정부에서는 영어 사용이 필수적이다.

종교

 

인도는 세계적 종교 발상지인 동시에 근거지이다. 각 시대를 통해 인도인들은 강한 종교적 기질을 보여왔다. 이러한 기질 때문에 힌두교·자이나교·불교·시크교 등 고유 종교가 발달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그리스도교·유대교·조로아스터교 등 외래 종교 또한 성장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는 애니미즘으로 아직도 산탈족·빌족·곤드족 등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에 의해 신봉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전통 종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힌두교로 그 기원은 BC 2000~1500년경 아리아족이 성립시킨 베다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인도 국민의 약 83%가 믿는 힌두교는 강력한 국민 통합요소이기도 하지만 카스트 제도와 함께 분열요소가 되기도 한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BC 6~5세기경에 힌두교에서 맨 먼저 파생된 종교이다. 자이나교는 지금도 구자라트와 라자스탄 지역에 넓게 퍼져 있다. 이 종교의 비폭력주의와 금욕주의는 힌두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마하트마 간디도 이 두 원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불교는 이 종교를 신봉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시기에 인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아소카 왕 사후 불교의 영향은 점점 줄어들어 다시 힌두교에 우위를 빼앗겼다. 하지만 불교는 티베트·중국·한국·일본·몽골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전파되어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와는 달리 자이나교는 인도에만 국한되어 있다. 현재 인도에는 불교도가 약 400만 명, 자이나교도가 약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외래 종교로는 정복자들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이슬람교가 가장 깊은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교는 처음에 상인들이 들여왔으나 이슬람교도의 침입에 힘입어 16세기 무굴 제국이 건설된 이후에는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던 지역이 독립 당시 파키스탄으로 분리됨으로써 현재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인도 국민의 10%를 약간 넘는 정도이다. 그리스도교의 일종인 조로아스터교는 7, 8세기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흘러들어온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오늘날 그 후손들은 주로 뭄바이에 모여 산다. 그리스도교는 BC 52년 사도의 하나인 토마가 인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몇 개의 교회를 건설하면서 처음 전파되었고 19세기 유럽인의 진출과 함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도의 수는 전체 인도 국민의 약 3%에 머물러 있으며 코친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서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

 

1891년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온 기대수명은 1931~61년에 이르는 30년 동안 급격히 증가하여 오늘날 남자의 경우 59세, 여자는 60세에 이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북부인도 주민들의 기대수명이 높은 반면 중부 및 동부 인도 주민들은 낮은 편이다.

 

인도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인구 조절이다. 주로 시골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되고 있는 가족계획본부에서 가족계획 상담과 피임기구 무료배포를 실시하는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구증가율을 낮추는 데 힘쓰고 있다. 모든 가족계획시술이 정부에 의해 무료로 제공되고 있으나 보수적인 일부 주민들이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인구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도의 경제

개요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나 정교한 행정조직과 관료제도, 양호한 교통·통신망, 우수하고 풍부한 인력, 잘 정비된 공업기반 등 일반적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1947년 독립 이후 많은 투자를 통해 공업부문에서 현재 세계 20위권 내의 공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무역부문에는 아직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아 수출량이 세계교역량의 1%를 밑돌고 있다. 한편 소수 지배계층은 매우 높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등 소득격차가 매우 큰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매년 1,000만 명을 넘는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도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개요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나 정교한 행정조직과 관료제도, 양호한 교통·통신망, 우수하고 풍부한 인력, 잘 정비된 공업기반 등 일반적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1947년 독립 이후 많은 투자를 통해 공업부문에서 현재 세계 20위권 내의 공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무역부문에는 아직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아 수출량이 세계교역량의 1%를 밑돌고 있다. 한편 소수 지배계층은 매우 높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등 소득격차가 매우 큰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매년 1,000만 명을 넘는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도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생물자원

전 국토의 절반이 경지이며 삼림지대가 약 1/4을 차지한다. 토질은 일반적으로 척박한 편으로 토양침식이 여러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삼림 역시 3/4가량은 잘 유지·보존되고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삼림의 분포가 일정하지 않아 가장 필요한 지역에 삼림이 가장 부족한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구가 밀집되고 집약적인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는 갠지스 강 유역에서 대표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평야지역에 유용한 삼림이 없기 때문에 토양의 건조와 식생의 고갈이 야기되고, 집중강우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히말라야 산맥과 일부 산악지역에서는 울창한 삼림을 볼 수 있다. 삼림지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경제수종은 티크·살나무·대나무·침엽수 등이다. 삼림은 대부분 국유지에 해당하여 전체 면적의 약 95%를 정부에서 소유하고 있다.

 

인도는 가축수에서 세계 제1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우유 생산량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우유 생산이 적은 이유는 가축의 질이 떨어지고 사료작물이 부적합하며 초지대가 한정되어 있고 가축관리가 전근대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도는 약 4,000만 마리의 양으로부터 매일 엄청난 양의 양모를 생산하고 있으나 1마리당 연평균 생산량은 900g 정도로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의 3.6~5.4㎏에 비해 현저하게 적고 질도 떨어진다. 이 양들의 사육은 주로 라자스탄·구자라트·하리아나의 평원지역과 히말라야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농업

 

인도에서 농림·수산업 부문은 국민총생산(GNP)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전국민 중 약 80%가 이에 종사하는 매우 비중이 크다. 특히 은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작물로 재배면적이 전체 곡물재배면적의 약 1/3에 이르지만 밀에 비해 다수확 신품종의 보급이 늦어져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지는 못하고 있다. 전체 곡물재배면적의 1/5을 차지하는 인도의 2번째 주요식량작물인 은 신품종의 개발 보급과 관개시설의 확장에 힘입어 최근 현저하게 생산량이 늘어나고 있다(→ 색인 : 녹색혁명). 그밖에도 옥수수·수수 등이 주요곡물로 손꼽힌다. 곡물 이외에도 야자·사탕수수·목화·황마·차·커피·고무·담배 등이 주요작물로 재배된다. 특히 황마와 차는 각각 방글라데시 및 스리랑카와 더불어 세계적인 생산국으로 이름이 높다. 이와 같이 경제에 있어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농업은 아직 전통적인 영농방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작이 가능한 토지 가운데 2/3 정도에 관개가 가능하나 실제로는 1/4가량만 관개가 이루어지고 있어 생산량이 기상변화에 크게 좌우된다. 또한 경작지는 소규모 분할소유에 소작제가 온존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 농가가 2㏊ 미만의 영세농가임에도 불구하고 녹색혁명은 주로 용수공급이 양호한 지역의 대규모 농가에 한해서 이루어짐으로써, 농업개발계획이 오히려 농가소득의 불평등을 초래해 새로운 사회적·경제적인 문제를 야기시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수산업

인도의 수산업은 긴 해안선과 많은 큰 강을 가진 수산자원의 잠재력에 비해 대부분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 그 발전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현재로는 소규모 연안어업이 주종을 이루는 반면 내지 양식업이나 인도양상에서의 원양어업은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임업의 경우도 인도 전체 면적의 1/5이 삼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목재 생산 등의 분야에서 임업이 인도 경제에 미치는 기여도가 꽤 저조하다고 할 수 있다.

공업

인도는 1950, 1960년대 2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 기간중에 상당한 규모의 공업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결과 여전히 소비재산업이 중심이 되고는 있지만 철강, 공작기계, 비료, 시멘트, 알루미늄 제조, 산업용 기계와 부품, 전기 및 수송장비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에서 온 비교적 정교한 공업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공업은 면직공업이며 차·설탕·의약품 제조 및 면방적공업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공업생산부문에서 1/10 정도를 담당하고 있는 자본재공업 중에서는 수송용 기계공업이 가장 중요하다. 소비재산업이 거의 전적으로 민간소유인 반면, 철강·기계·화학·석유화학·광업 등 자본재 및 기간산업 분야의 투자는 대부분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사기업은 소수의 재벌가문에 장악되어 전문경영제도의 도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공업 발달이 가능했던 것은 풍부하고도 유능한 인력과 잘 정비된 행정체계, 교통 및 동력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에너지

인도는 풍부한 편은 아니나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 자원을 갖추고 있다. 히말라야와 다른 여러 산맥에서 상업적으로 개발 가능한 수력발전량이 8,000만~1억kW에 이른다. 석탄 역시 풍족하나 대부분이 비하르 주와 서벵골 주에 집중되어 있고, 매연 때문에 사용이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석유 자원 역시 별로 없다. 시골에서는 아직도 쇠똥과 땔나무를 주요가정연료로 사용하고, 도시에서는 등유, 천연 가스, 전기 등이 주요한 가정연료가 되고 있다. 등유와 전력도 폭넓게 쓰이고 있다. 인도는 석탄, 석유, 천연 가스, 핵연료, 수력을 이용해 전력개발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는데, 이러한 전력생산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저품위의 석탄을 이용한 화력발전이다. 마하라슈트라 주의 타라푸르, 라자스탄 주의 라나프라타프사가르, 타밀나두 주의 칼파크캄 등에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어 있다.

금융

인도는 비교적 발달된 은행체계를 갖추고 있다. 중앙은행인 인도 준비은행이 여러 제도를 통해 모든 은행활동을 엄격히 규제한다. 최근까지 거의 대기업들의 소유였던 주요상업은행들은 무역업 및 공업 부문에 단기자금을 공급하면서 농업과 중소기업 부문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은행 서비스를 다양화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정부가 1969년 큰 상업은행 14개를 국유화하고 1980년에 6개 은행을 다시 국영화하면서 농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증가되었다. 외국은행과 6,670만 달러 이하 규모의 은행은 국영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현재 은행업의 90% 이상이 공공부문에 속하며 국영화 이후 은행지점망이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도의 자본시장은 비교적 발달되지 않은 편이다. 뭄바이·콜카타·첸나이·델리·아마다바드 등의 대도시에 주식매매소가 설치되어 있지만 기업들이 참여하기를 꺼리는 상태이다. 이익을 기업내에 유보시켜 재투자하는 것이 세법상 유리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이익금 배당에 인색하고 높은 세율 때문에 거대한 자본 암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자본시장발달의 저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무역

대외무역은 인도 GNP에서 매우 적은 양을 차지하며, 세계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 미만이다. 수출입구조는 1950년대만 해도 황마제품·차·면직물 등 전통적인 품목들이 수출을 주도했으나, 그 이후 황마 및 섬유수출은 정체를 보인 반면 철광석·철강·기계 등이 주요수출품목으로 등장했다. 다량의 곡물을 비롯해서 원면·석유·윤활유·비료·철강제품·비철금속 등의 원료와 중간재, 각종 기계·기구류 등의 자본재가 주요수입품목이다. 전체 수입액의 1/3이 넘는 석유를 비롯하여 비료, 철강완제품, 경제성장에 따른 필수적인 물자의 수입증대로 무역수지는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도 정부는 수지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수입통제정책을 취하고 있다. 외국원조는 식량원조가 대부분으로 미국·영국·서독·캐나다·일본이 주요원조국이다.

교통

 

영국통치시대에는 전략적·상업적 이유로 도로건설이 이루어졌지만 그밖에는 대체로 철도교통에 관심이 집중되어왔기 때문에 인도의 도로교통은 1920년대까지도 그리 발달하지 못한 편이었다. 그후 1943년부터 나그푸르 계획에 의해 당시 총연장 35만km이었던 도로를 54만km로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그중 20만km를 포장하기로 하면서 인도의 도로교통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독립 이후에도 도로건설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나그푸르 계획에 따라 고속국도·고속주도·주요지방도·지방도 등 도로를 4단계로 구분하여 고속국도는 수도와 항구·주요도시를, 고속주도는 각 주도와 고속국도 및 주 내의 주요도시를, 주요지방도는 지역 내 주요지점과 고속국도·고속주도 및 그 지방을 통과하는 철도를, 지방도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도록 했다.

 

철도는 다른 무엇보다 인도를 통합하고 근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인도는 총연장 6만 2,000km의 철도를 보유하고 있어 미국·소련·캐나다에 이어 세계 제4위의 철도보유국으로 손꼽힌다. 인도의 철도는 인도에서 가장 큰 공공부문으로 철도청 장관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있다. 철도와 도로 교통은 잘 통합되어 있으며 최근까지 가장 값싼 운송수단이었던 내륙수로와도 연결된다. 철도의 확장과 도로교통의 발달이 수운의 중요성을 감소시켰으나 몇몇 지역, 특히 서벵골 주와 케랄라 주에서는 아직도 수운이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가항수로는 1만 5,000km로, 그중 서벵골 주의 갠지스 강과 브라마푸트라 강,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고다바리 강과 크리슈나 강, 타밀나두 주의 코베리 강, 케랄라 주와 오리사 주의 운하 등이 주요수로로 꼽힌다. 항공교통은 1920년에 실험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여 1930년과 1945년 사이에 민간항공부문에서 급속도로 팽창했다. 1953년에는 항공교통을 국유화하여 국내선 인도항공(Indian Airlines)과 국제선 에어인디아(Air India)를 설립했다. 1981년에는 제3항공사인 바유도트(Vayudoot)가 설립되어 그 이전에는 접근이 어려웠던 인도 북동부 지역에 항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도의 정치와 사회

정부조직

연방공화국인 인도는 25개주와 7개 연방직할주로 구성되어 있다. 주급 행정단위로는 안드라프라데시(주도는 하이데라바드)·아루나찰프라데시(이타나가르)·아삼(디스푸르)·비하르(파트나)·고아(파나지)·구자라트(간디나가르)·하리아나(찬디가르)·히마찰프라데시(심라)·카르나타카(방갈로르)·케랄라(트리반드룸)·마디아프라데시(보팔)·마하라슈트라(뭄바이)·마니푸르(임팔)·메갈라야(실롱)·미조람(아이자울)·나갈란드(코히마)·오리사(부바네스와르)·펀자브(찬디가르)·라자스탄(자이푸르)·타밀나두(첸나이)·시킴(강토크)·트리푸라(아가르탈라)·우타르프라데시(러크나우)·서벵골(콜카타)·잠무카슈미르(스리나가르)가 있으며, 연방직할주로는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주도는 포트블레어), 찬디가르(찬디가르), 다드라나가르하벨리(실바사), 다만디우(다만), 델리(델리), 락샤드위프(카바라티), 퐁디셰리(퐁디셰리)가 설치되어 있다. 인도는 연방정부와 이들 주정부 간의 역할 분담에 의해 국정이 운영된다. 연방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실행되어야 할 여러 사항들, 즉 국방, 외무, 교통·통신, 화폐 및 동전 주조, 고등법원 운영 등에 관한 업무를 관할하는 한편 그외 경찰, 공중보건, 교육, 임산자원 관리 등 지방업무의 성격을 띤 분야는 주정부에서 담당한다(→ 연방제도).

 

행정부는 대통령·부통령·국무위원회로 구성되며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를 갖는 대신 행정실무는 내각 수반인 총리가 담당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삼권분립). 대통령은 상하양원과 각 주의 주의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다. 대통령은 35세 이상의 인도 시민이어야 하며 하원의원으로서의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 임기는 5년이고 재선이 가능하다. 부통령은 상하양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다.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국무위원회는 내각을 구성하는 장관들로 구성된다. 연방의회는 상원(라자사바)과 하원(로크사바)으로 나누어지는데, 하원은 각 주의 각 선거구마다 주민들에 의해서 직접 선출되는 530명 이내의 국회의원과 연방직할주를 대표하는 20명 이내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의 임기는 회기 개시일로부터 5년이다. 상원은 250명 이내로 구성되는데, 그중 12명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나머지는 하원의원이 선출하는 간접선거 형식을 취한다. 상원은 해산되는 것이 아니고 2년마다 성원의 1/3씩을 교체한다.

 

주정부의 형태는 연방정부와 매우 흡사하다. 주정부는 대통령이 5년 임기로 임명한 주지사 및 주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주국무위원회로 구성된다. 각 주마다 입법부가 있는데, 대부분의 주가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반면 몇몇 주에서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인도의 정당들은 총선시 여러 주에서 후보를 낸 후 경합을 벌여 전국적으로 4% 이상의 지지율을 확보해야만 다음 총선에서도 여러 주에 후보를 낼 수 있도록 인가를 받는다. 이런 정당들은 특정한 심벌을 할당받으며, 각 주에서 입후보한 후보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특정 정당 소속임을 알린다.

 

사법부는 대법원·연방고등법원·주고등법원·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델리 연방직할주와 각 주에는 고등법원이 하나씩 있으며, 아삼 주와 나갈란드 주, 펀자브 주와 하리아나 주는 한 고등법원이 공동관할한다. 군의 최고 지휘권은 대통령에 위임되어 있는 반면 행정 및 작전상의 통제는 국방부와 육해공군 사령부에서 담당한다. 국방부에서는 주로 육해공 3군의 균형발전과 활동사항을 점검하고 정책 입안과정에서 정부가 내린 결정들이 3군 사령부로 이관되어 잘 실행되는지의 여부와 국회의 동의를 받은 국방예산업무를 관장한다. 이와 같이 군의 행정 전반은 국방부에서 관할하는 반면 육해공군 사령부에서는 이것의 실제적인 실행과정을 총괄한다. 각 군간의 활동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국방부는 각 단계별로 위원회들을 두고 있다. 최고심의기구는 내각에 설치된 정책위원회로, 모든 주요국방사무가 이곳에서 총리의 주재 아래 결정된다.

교육

교육은 일차적으로 주정부의 책임 아래 있다. 연방정부는 주로 교육시설의 조정, 고등교육의 학제결정, 연구 및 과학기술교육 등에 관여하며, 중앙교육자문위원회가 있어서 전반적인 교육정책을 수립한다. 알리가르이슬람대학교(알리가르)·바나라스힌두대학교(바라나시)·비슈바바라티대학교(샨티니케탄)·자와할랄네루대학교(델리)·하이데라바드대학교(하이데라바드) 등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다. 인도 국민 중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2정도에 불과하나, 이 비율도 1947년 독립 당시보다 2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초등교육은 6~11세까지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5년간 인도 전역에서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중등교육도 대부분이 무상이다. 학생수의 급격한 증가와 여러 언어로 교육을 시행해야 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지만 여성교육, 사회교육, 성인교육, 농촌의 고등교육 분야에서 현저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 및 기술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제트 엔진 및 원자력발전소 제작, 컴퓨터 설계, 새로운 로케트 연료 개발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원자력 부문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등 여러 나라에 수출할 정도로 그 기술수준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공중·보건

공중보건 역시 일차적으로 주정부가 담당하지만 연방정부도 공중보건 계획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연방정부는 특히 말라리아·결핵·나병·천연두·성병·트라코마·암 등의 질병 퇴치를 위한 범국가적인 체계를 수립하여 지원하고 있다. 또한 연방정부는 상하수도·공중위생·영양섭취 등과 관련된 계획을 수립한다. 인도에서는 세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 때문에 가족계획사업이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 사업도 연방정부의 지원 아래 각 지방이 주관하여 실시한다. 범국가적인 질병퇴치운동으로 많은 질병들이 성공적으로 극복되어, 흑사병과 천연두는 완전히 박멸되었고 콜레라와 말라리아에 의한 사망도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일부지역에서는 풍토병이 발생하고 있으나 전염병 발생율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졌다.

경찰·군사제도

각 주정부는 주내무부 관할 아래 경찰력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중앙에서 연방정부의 내무장관이 중앙정보국, 중앙조사국, 중앙수사관양성소, 중앙법과학연구소, 중앙지문연구소, 사르다르발라브바이바텔 전국 경찰 아카데미 등 전국 규모의 여러 기관들을 관장하면서 조정기능을 담당한다. 육·해·공군과 해안경비대로 결성된 인도군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각 군은 자원입대병만으로 구성되며 잘 훈련되고 전문성을 지닌 장교군단이 이끈다. 대체로 높은 수준의 장비를 옛 소련에서 들여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국가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군은 국내 정치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으며, 군을 배경으로 한 쿠데타도 발생한 적이 없다.

 

 

인도의 문화

개요

 

인도의 예술과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예술에서 현대예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독립이래 연방정부와 여러 주정부는 랄리트칼라아카데미(국립 미술 아카데미)·상게트나타크아카데미(음악·무용·드라마 아카데미)·사히티아아카데미(국립 문학 아카데미) 등 여러 문화·예술 관련기관을 설립하여 예술·문화활동을 촉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랄리트칼라아카데미는 1954년 미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미술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설립되었다. 오늘날에는 매년 전국미술전람회를 개최하고 인도의 미술품 및 공예품을 해외에 소개하는 한편 동서양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개최한다. 1968년부터는 3년에 1번씩 국제적인 규모의 현대미술박람회를 개최해왔다. 이 단체에서는 해마다 전국미술전람회 출품작 중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상을 수여하기도 한다.

 

연극·무용·음악 등은 1953년에 설립된 상게트나타크아카데미에서 주로 관장한다. 이 단체에서는 주로 연극·무용·음악 부문의 연구를 촉진시키고 극장과 예술가양성소 설립, 세미나 및 축제 개최, 우수한 작품에 대한 시상, 여러 방면의 문화적 교류 등을 추진한다. 또한 음반·서적·영화 도서관과 음반제작소 및 악기·가면·무대의상 전시실 등을 운영한다. 상게트나타크아카데미에 부속된 예술가 양성소로는 뉴델리의 국립 드라마 학교와 인도무용을 가르치는 카타크 켄드라(뉴델리에 있음), 임팔에 있는 자와할랄 네루 마니푸리 무용 아카데미가 있다.

 

이러한 문화활동은 힌디어나 각 지역방언을 이용, 인도의 드라마 및 문학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전인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전인도 라디오 방송은 주간 또는 월간으로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년 음악 축제를 개최하여 젊은 음악가 및 극작가들을 발굴하기도 한다.

 

인도 문학은 사히티아아카데미(1954 설립)와 함께 발전해왔다. 이곳에서는 4권으로 된 〈인도문학도서목록 National Bibliography of Indian Literature〉(1901~53)을 간행했으며 인도를 포함한 세계문학작품들을 인도에서 통용되는 여러 언어로 번역·출간했다. 또한 시인 타고르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다. 잡지로는 격월간 문학지 〈인도문학 Indian Literature〉과 계간지 〈산칼렌 바라티야 사히티아 SanKbleen Bhbratiya Sbhitya〉, 1년에 2번 나오는 〈산스크리타 프라티바 Sanskrita Pratibha〉가 각각 영어·힌디어·산스크리트로 발행된다.

 

국립서적공사는 1957년 문학작품 창작 및 출판을 북돋우고 저렴한 가격으로 책들을 도서관이나 교육기관, 일반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교육·과학·문화·인문 관계 서적들과 인도 및 세계 고전문학을 인도의 주요언어들로 소개하는 한편 격년제로 국제서적전람회를 개최한다. 전국 또는 지방별로 서적전시회, 세미나, 작가 캠프 등의 행사를 주최한다. 또한 해외에서 열리는 주요 국제서적전람회에 인도의 서적을 전시하는 일도 담당하고 있다.

신문·방송

신문은 영국 통치기에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나, 독립 후 헌법에 의해 언론·표현·출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배려로 대부분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현재 인도에서는 일간·격일간·격주간·월간·격월간·연간으로 2만 여 종 이상의 정기간행물이 발행된다. 이 간행물들은 여러 언어로 인쇄되고 있으나 힌디어·영어·벵골어·우르두어로 간행되는 신문이 가장 많다. 문자해독인구가 가장 많은 케랄라 주에는 갖가지 언어로 발행되는 90종 이상의 일간지가 있으나 대부분 2~4쪽 분량의 정보지 수준이다. 아랍어·미얀마어·중국어·네팔어·포르투갈어·스와힐리어 등 외국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이 상당수 있으나 이들 신문의 발행부수는 약소한 편이다. 문자해독인구가 전체 인구의 1/2정도에 불과한 인도에서는 말이 글보다 정보교류에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라디오나 TV가 신문보다 훨씬 많은 청중을 확보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시청각매체는 가장 강력한 선전매체이자 대중전달 수단으로서 정부의 독점 아래 운영된다. 전인도 라디오 방송(All-India Radio)의 중파방송과 단파방송이 인도 전역에 송신되고 있다. 최근에는 비디오와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있으며 비디오 대여점과 촬영실이 주요도시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다.

영화

인도에서는 라디오뿐만 아니라 영화도 강력한 대중전달 수단으로 발달해왔기 때문에 극장이 도시와 읍, 큰 마을 단위까지 들어서 있다. 매년 많은 영화를 제작하여 일본·미국 다음가는 세계 3위의 영화 제작국으로 부상했다. 정부차원에서 운영되는 여러 위원회들이 영화산업을 관장한다. 남부에서 쓰는 드라비다계 언어로 제작된 영화가 총 영화제작편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공용어인 힌디어를 비롯해 벵골어, 마라타어로 제작된 영화들이 그 뒤를 잇는다.

 

푸네에 자리잡고 있는 국립인도영화기록보관소는 국내 영화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유지·보존하기 위해 1964년 설립되었다. 그밖에도 국립영화발전공사와 영화축제관리위원회가 있어 정부의 경제 정책과 정치적 사항들을 반영하는 영화제작을 촉진시킨다. 어린이영화협회에서 어린이 영화의 제작과 유통과정을 관리하며 정부의 정보방송부에서 설립한 인도영화협회가 영화제작기술훈련과 영화기술연구를 위한 편의시설 등을 제공한다. 이곳에서 실시하는 영화기술 훈련은 감독·대본·영상·녹음·편집·연기 부문 등 영화작업 전반에 걸쳐 있다.

 

인도 영화의 주된 주제는 사회문제이며 신화·전설·종교도 일부분을 차지한다. 상업영화와는 별도로 정보방송부 산하 영화국에서 기록영화와 뉴스영화를 15개 지방 언어로 다량 제작한다. 이 중에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할 정도로 높은 작품성을 지닌 것들도 있다. 모든 영화관은 영화 상영시 관계관청의 승인을 받은 교육·과학적 내용의 기록영화나 뉴스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정부는 영화재정공사를 설립하여 국가적 문제나 사회적·문화적 가치를 지닌 영화를 제작하는 우수한 영화 제작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1980년 영화재정공사와 인도영화수출공사는 국립영화발전공사에 합병되었다. 인도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미국·동아프리카·모리셔스·서인도제도·스리랑카·싱가포르·말레이시아·미얀마·타이·피지·인도네시아·서아프리카·페르시아 만 지역 등지로 수출된다. 러시아 연방과 동유럽권 국가들도 인도 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해외에서는 주로 힌디어로 제작된 영화에 주된 관심을 보이며 타밀어와 벵골어로 제작된 영화들도 인기를 얻고 있다. 서방에서 제일 지명도 높은 인도의 영화제작자는 벵골어 영화를 제작하는 사티아지트 라이이다. 인도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1951년 영화검열을 위해 설립된 영화심의중앙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 뭄바이에 본부를 둔 이 위원회의 회원들은 정부의 위촉을 받아 선임된다.

 

인도의 역사

 

BC 1500~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나갔다. 이 시기에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나왔고 산스크리트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국어로 사용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BC 6세기에 나타났다. 북부 인도는 찬드라 굽타(BC 321경~185)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왕(BC 238 죽음)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2/3가량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그후 수많은 소왕국들로 분열되었다가 굽타 왕조(AD 320~480)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은 AD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 14세기초에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가 델리 술탄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인 바만 왕조가 성립(1347)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가 1336~1556년에 걸쳐 남부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7~98)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포르투갈인·영국인·프랑스인·네덜란드인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초에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 대왕(1556~1605)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동인도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동인도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 다음 해인 1858년에 영국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국민회의(1885)와 전인도이슬람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협조적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와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의회 민주주의를 잘 이끌고 있다. 하지만 파키스탄과 3번의 짧은 전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전쟁에서 1971년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1980, 1990년대 들어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인도사 ).

 

 

인도와 한국과의 관계

 

남북간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2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3년 12월 10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으며 북한 역시 1962년 영사관계 수립을 거쳐 1973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인도는 국제무대에서 한반도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편 경제문제 등에서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 힘쓰고 있다. 양국간에는 1974년 8월 맺은 무역협정을 시작으로 문화협정(1974. 8)과 과학기술협력협정(1976. 3)이 체결되었다. 교역량이 점차 증가추세에 있어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 11억 7,697만 달러, 대한수출액 9억 7,572만 달러이다. 장기 체류 외국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으로 1997년 현재 교민수는 39명, 체류자수는 1,190명이다.

 


 

인도사 [history of India, 印度史]

현재의 인도공화국과 1947년에 각각 분리·독립한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 공화국도 포함하는 인도아대륙(인도반도)의 역사.

 

남쪽으로는 드넓은 대양이 감싸고 있고, 북쪽으로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북극의 찬바람과 중앙 아시아의 건조한 기류를 차단시켜준다. 이와 같은 지형적 영향으로 인도아대륙은 최북단에 해당하는 잠무와 카슈미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열대성 기후대를 이룬다.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곳은 북서쪽과 북동쪽뿐인데,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대부분 이 지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쪽으로는 구릉들과 산들로 이루어진 인도-이란 국경이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미얀마 국경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인도아대륙은 대체로 북부지역의 인더스·갠지스 강 유역과 남부지역의 인도반도로 구분된다. 인더스와 갠지스 강 유역은 광막한 충적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위대한 두 도시문화, 즉 BC 3000년경의 인더스 강 유역 문명과 BC 1000년경의 갠지스 강 유역 문명을 낳은 중심지였다. 남쪽으로 이 지역을 반도와 분리시키는 구릉들과 산림지대에는 오늘날까지도 원주민이 살고 있다. 이 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르마다 강이 흐른다. 이 강은 오랫동안 북인도와 남인도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북부인도는 고유문화와 인종을 가진 여러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 고지대는 강우량이 낮은 지역으로, 주로 밀과 보리를 생산하는 곳인데,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란계의 이웃 종족들과 매우 유사하다. 인접해 있는 인도 평원도 강우량이 극히 적은 지역이지만, 해마다 범람하던 인더스 강과 근래에 들어서는 운하에 의한 관개수로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상응하여 발루치스탄 지역보다 인구밀도도 높다. 인더스 강 유역은 북쪽의 펀자브 지역과 중앙의 신드 평원, 남쪽의 인더스 삼각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색인:인더스 계곡). 이 삼각지대의 동쪽은 타르 사막 지역이며, 이곳은 다시 반도의 최북단인 아라발리 구릉지대와 접해 있다. 이 지역들을 벗어나면 라자스탄 구릉지대와 말와 고원이 펼쳐진다. 그 남쪽은 카티아와르 반도인데, 이 지역은 지형적·문화적으로 라자스탄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 지역들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보다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그러나 지형적인 이유들 때문에 다소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북부인도의 펀자브와 라자스탄 동쪽은 대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여러 강줄기들과 북쪽의 히말라야 산 기슭을 따라 펼쳐져 있다. 그 남부지대는 언덕과 수많은 단층애로 길이 끊긴 산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디아 산맥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반드레르·레와·카이무르 평원 등이 속해 있다. 중앙 인도의 구릉지대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갠지스 강 본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지역은 높은 인구밀도와 적당한 강우량 및 고도의 농업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곳이다(→ 색인:인도 갠지스 평원).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BC 1000년경부터 이 이 지역의 주식으로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록 서쪽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인도는 이 북동부 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 들어 밝혀지고 있다.

 

 

선사시대의 인도 문명

초기 선사시대

인도아대륙에서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멀리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이 시기의 수렵인들은 오랫동안 인도대륙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정착농경사회와도 밀접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은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에서 동부의 벵골에 이르는 지역 및 북부의 서북 국경지대에서 남부의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아직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인도문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차원의 지식을 제공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공동체의 삶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양·물소 등의 가축을 길렀던 흔적도 보인다. 당시의 수렵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는 활과 화살이 대부분인데, 날카로운 돌조각을 이용한 작살이나 도끼 등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냥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단계의 어로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인도아대륙에서는 정착농경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들로서는 케랄라 동쪽 산기슭의 마라이유르, 구자라트의 랑나지, 라자스탄의 바고르, 마디아프라데시 인근의 모샹가바드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인더스 문명

 

수렵과 채집생활의 신석기 단계를 거친 인도아대륙은 점차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도시문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도시문화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인더스 문명은 BC 4000년경 발루치스탄 고원지대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농경문화가 BC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의 범람지로 확대·발전되면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문화이다. 인더스 강 문화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 경과 그의 동료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시행된 유적발굴조사 결과 이 문명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발굴자들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어떤 문명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했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런 가정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두 문명은 서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받은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문명 자체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고유한 것이었음이 고고학적 조사결과 입증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연한 도시계획에 있다(→ 색인:인도건축). 건물들 사이는 일정한 간격을 둔 바둑판 모양의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골목길 상하 좌우로는 벽돌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사방으로 연결되는 수로를 판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방향으로는 성채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높게 건설되었고, 그 아래로는 시가지가 격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칼리방가 지역을 예로 들면 거리의 너비와 모양이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주요도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작은 골목길들은 서로 분기점을 이루면서 각각 크고 작은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시의 기능과 효율성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삼 이들의 도시계획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일반적인 건축재료는 벽돌이었다. 구운 벽돌과 진흙 벽돌을 건축물의 사용목적에 따라 각각 구별해서 썼다. 예를 들어 제방이나 대중집회소에는 진흙벽돌을 사용했고, 목욕탕·성벽·수로 등에는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 이때 벽돌을 쌓는 방법은 벽돌의 가로면과 세로면을 1번씩 겹치게 하는 이른바 영국식 쌓기를 주로 이용했다. 이 벽돌 외에도 필요에 따라 목재를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당시의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모헨조다로하라파이다. 특히 모헨조다로에서는 대중목욕탕이 발견되어 이 문명의 질적 수준과 함께 당시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 목욕탕은 성채의 북쪽 중간지점에서 잘 보존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약 83㎡ 크기의 벽돌 구조물이었다. 그 내부는 높낮이가 다른 2단의 바닥으로 설계되어 있어, 1단 높은 곳은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장으로 추정된다. 한편 목욕탕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일단의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벽돌로 만든 약 1.5m 높이의 연단들이 보인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지배자였던 정치권력자나 제사자들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이곳은 경건한 종교의식을 행하기 직전에 공동으로 몸을 닦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색인:정화의식).

 

모헨조다로의 북서쪽 12km 지점에 위치한 하라파 지역 역시 모헨조다로와 거의 대동소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라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신상(母神像)·동물상·장의(葬儀)의 풍습이 약간씩 다를 뿐이다. 특히 하라파의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례와 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정한 구역에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여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 다음, 유골만을 다시 추려 항아리 같은 용기에 담아 땅속에 매장했다(→ 색인:묘지). 이른바 조장(鳥葬)의 풍습이다. 여기서 어렴풋이나마 생명의 환생에 대한 하라파인들의 기대심리를 엿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시신을 다른 짐승들의 먹이로 베푸는 보시를 통해 영계(靈界)로의 여행을 돕는 음조(陰助)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인들의 종교 성향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꼽고 있는 윤회설의 원시적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로는 칼리방가·로탈 등이 있다.

 

인더스 문명은 대개 BC 1750년 무렵을 전후하여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된 것은 최근 과학의 발달로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은 BC 2300경~1750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갑작스러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홍수에 의한 자연재해설, 인구폭발에 따른 식량부족설, 외부의 공격에 의한 파괴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가정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멸망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 인더스 문명이 그후의 인도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인도문명의 전개

 

아리아인의 침입과 카스트의 정착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로 대표되던 인더스 강 유역의 문명이 몰락하면서 인도문명의 중심지는 갠지스 강 유역과 남인도의 해안지방으로 옮겨지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도시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 문화의 형성시기를 전후한 인도역사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아리아인의 민족이동과 인도 정착이다. 원래 아리아인은 시베리아 남북부와 투르키스탄 등지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BC 18, 17세기경부터 서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열대를 가로지르면서 목초지를 따라 민족대이동을 시작했다. 점차 하나의 세력집단을 이루게 된 아리아인들이 인도아대륙에 이른 것은 대략 BC 15~13세기경이었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은 처음에는 펀자브 지역에 정착했으나, 서서히 활동무대를 갠지스 강 유역으로 옮겼다.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도에는 여러 부족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드라비다인 등 몇몇 종족만이 확인될 뿐이다.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이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의 혼혈이다. 침략자 아리아인들은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비교적 쉽게 승리했다. 그 이유로는 첫째, 그들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능했다는 점, 둘째, 문명발달 단계에 있어서 원주민들이 청동기문명 단계에 머물고 있었던 데 비해 이들은 이미 철기문명에 접어들었다는 점, 셋째, 월등한 체격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쟁에서 이긴 정복민족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리아인들은 원주민을 노예화했다. 그 우월의식의 사회화가 바로 카스트 제도이다. 카스트 제도란 승려·사제 계급인 브라만(Brahman), 귀족·지배 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평민계급인 바이샤(VaiŚya), 노예계급(원주민)인 수드라(Śūdra)로 분류되는 신분계급이다. 이들 가운데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이외에는 거의 인격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철저한 계급사회를 확립시켰다. 특히 수드라의 경우에는 사고팔거나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사회통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신분제도는 마누 법전에 명기된 이래 인도의 전통적 관습으로 굳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악습이 되고 있다. 브라만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으로서,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하던 사제 그룹이다. 이는 제정일치를 이상으로 삼던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공통된 관습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의 세계를 상정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그 신의 권능에 의지하려는 습속은 아리아인들의 기본 종교관이었다. 그 신을 찬양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법식을 집대성한 성전이 바로 〈리그베다 Rigveda〉이다.

 

아리아인들이 바로 오늘날 유럽 인종의 조상이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나아가 슬라브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활동무대로 삼고 있는 서양인들의 선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정형화시킨 사람은 비교종교학자인 막스 뮐러였다. 그는 고대의 인도언어인 산스크리트와 근대 영어를 언어학적으로 비교·분석하여 마침내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오늘날 이 학설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대 도시국가의 성립

 

펀자브 지역에서 갠지스 강 중류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BC 7세기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가진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국가형태는 정치학적으로 볼 때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명목상 부족을 대표하는 왕이 있는 나라도 있었으나, 실권은 부족장회의에 있었으며, 왕은 거의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이때 번성한 나라들은 주로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특히 코살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마가다국은 5만여 부락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장 번성했던 나라로 추측된다. 또한 중부인도에 위치해 있던 비데하도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자나카 왕의 통치기에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한편 카시 왕국은 BC 7세기까지 북부인도의 강자로 군림했으나, 그후 코살라국에 합병되었다. 따라서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BC 7세기를 전후한 인도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정복전쟁을 야기시켰다. 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은 BC 4세기경까지 이어진다. 이런 정복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마가다 왕국의 왕 빔비사라(BC 582~554 재위)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족장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내치의 공고화와 주변 소왕국들의 합병을 병행하면서 대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이즈음 훗날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된 고타마 싯달타에 의해 불교가 일어난다.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샤트루(BC 554~527 재위)는 부왕의 뒤를 이어 계속되는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카시·코살라·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아대륙의 최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전성기의 마가다국은 서쪽으로는 야무나 강에서, 동남쪽으로는 칼링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BC 327~326) 때에는 난다 왕조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다.

마우리아 제국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입은 인도의 정치·종교·문화·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선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동서문화와 사상이 서로 교류·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간다라 예술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조각 양식과 〈밀린다팡하 Milinda-pañha〉 같은 불전이 당시의 대표적 교류 흔적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이 인도 국민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외부의 침입에 무력했던 인도인들이 이를 계기로 새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정신의 고양에 힘입어 인도를 통일하게 된 왕이 바로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 굽타(BC 327~297경 재위)이다. 우선 그는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서북인도를 평정했다. 계속하여 그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그리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늘날의 카르나타가 남부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전지역을 통일한 셈이다. 이 통일은 인도 최초의 강대국으로서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온 마가다의 경제적 기반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사이슈나가 왕조 이래의 마가다국의 팽창정책이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찬드라굽타의 인도통일은 인도인의 손에 의한 최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마우리아 왕조는 이 찬드라굽타로부터 시작된다.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제3대 아소카왕(BC 273~232 재위) 때 번영의 절정기를 맞는다. 그는 데칸 동부의 칼링가를 정복하는 등 남인도의 키스트나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또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까지, 북쪽으로는 카슈미르 및 네팔까지도 자기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결과적으로 인도반도의 남단부인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인도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광대한 영역은 중앙의 직할지를 비롯해 지방 총독이 관할하는 4구역으로 분할·통치되었다. 각각의 행정부처를 담당하는 다수의 관리가 임명·배치되었으며, 지방관리를 감독·통제하는 순회감사관 제도도 시행되었다. 그 최정점에 있는 의 권력은 실로 엄청났다. 이 아소카 왕대에 비로소 제국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즉 완비된 행정조직과 잘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효과적으로 관리·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소카 왕은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살륙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무력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살생금지·비폭력이라는 불교정신에 기초하여 국가를 자비로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비문 또는 석주(石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불교에서는 그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번성하던 마우리아 제국도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분열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여러 왕자들이 각자의 영역을 분할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화폐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으로도 통일제국의 기능을 원활하게 발휘하지 못했던 점 등을 몰락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유능하고 강력한 군주였던 아소카 왕의 재임시에는 그런 대로 잠재되어 있었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가 제국의 몰락에까지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우리아 왕조의 분열과 쇠퇴로 인도대륙은 다시 수많은 군소왕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굽타 왕조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뒤에도, 통일제국을 꿈꾸는 군소 왕국들의 부침(浮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마우리아와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북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320~540)를 가리켜 불완전하나마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의 기본 골격인 중앙집권체제가 비록 완전하지 못했으나, 그 세력권이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에서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굽타 왕조는 인도아대륙의 실질적 강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굽타 왕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마가다 지방의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세력가 집안이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면서 서서히 왕조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왕조는 제3대 왕인 찬드라 굽타 1세의 등극을 계기로 비로소 인도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한낱 지방 공국에 불과했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그는 바이살리의 명문 귀족 리차비가(家)의 공주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정통적 왕가인 리차비 왕가를 혼인동맹의 상대로 삼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미미한 가문이었던 굽타 왕조가 그 계급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찬드라굽타 1세의 등극시기가 320년경이기 때문에 굽타 왕조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가다와 우타르프라데시의 동부지역을 지배했다. 찬드라굽타 1세는 330년에 왕권을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에게 넘겨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알하바드 지역에 해당하는 프라야가에 세워졌던 석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무드라 굽타는 델리 주변과 우타르프라데시 서쪽에 있던 4개의 소왕국을 정복했으며, 동인도와 남인도의 군소 왕국들로부터도 충성을 맹세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영역이 현재의 첸나이 지역인 칸치푸람의 동해안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갠지스 강 서쪽 유역인 아리아바르타 지역의 8명의 왕도 무력으로 평정했다. 결국 그는 북인도의 전역을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합병하지 못한 지역들로부터는 조공을 받아냄으로써 인도아대륙의 실질적인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명실상부하게 인도 전역에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쿠샨 왕조를 비롯한 일부 도서지방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찬드라 굽타 2세는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1세의 이름을 딴 군주로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영명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375~415년의 약 40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찬드라굽타 2세의 주된 적대세력은 샤카족이었다. 이들간의 세력다툼은 388년 이후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409년을 고비로 결국 샤카족은 굽타 왕조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서북인도가 완전히 굽타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서북 지방의 항구도시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와 활발한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이후 굽타 왕조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과도 문화적 교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과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한편 찬드라굽타 2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이 405~411년에 인도를 여행하고 남긴 〈불국기 佛國記〉에 의하면 당시의 굽타 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문화수준을 간직하고 있었던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한 예로 찬드라굽타 2세는 산스크리트 극작가인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둘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고 아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비크라마디티아(Vikramāditya:'용맹의 태양')라는 칭호로 불리던 그의 또다른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번영을 누리던 굽타 왕조도 제6대 왕인 쿠마라 굽타(415~454) 때부터, 서북 변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헤프탈족 등의 잦은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쿠마라굽타는 이들 이민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그의 뒤를 이은 역대의 왕들은 더이상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왕국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혼란을 틈타 지역 영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위기도 가중되어 마침내 굽타 왕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인도아대륙은 또 다시 대규모의 민족적 이동과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면서 여러 군소왕국들이 난립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 때 일어난 나라들이 마우카리·푸시아부티·마이트라카 등이다. 이들간의 각축장에서 푸시아부티가(家) 하르샤 왕이 일정 기간 인도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 인도에서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그후 300여 년 동안 이 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주변 소왕국들의 압박으로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다.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문화의 부흥기로 불릴만큼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산스크리트로 씌어진 시와 산문이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하게 저술되었다. 이때 활약했던 칼리다사 등은 오늘날에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당대의 최고 극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조각과 건축물 등의 조형물에서도 최고도의 수준에 달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불행히도 당시의 건축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불교의 승원(僧院 vihara)과 예배소(chaitya) 등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 이유는 8세기에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의 철저한 파괴행위 때문이다. 불교와 힌두교도 이 시기에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힌두교는 그 세력을 점차 인도 전역으로 확대시켜 나가지만, 불교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도의 이슬람 시대

 

델리 술탄국

10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인도대륙은 투르크와 아랍계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인도를 침입하여 유린한 대표적 세력이 가즈나마흐무드와 그의 사후 혼란기를 틈타 가즈나를 타도, 지배하게 된 구르 왕조의 무하마드 등이다. 이들은 인도를 공격하여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탈취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기보다는 인도대륙 전체를 그들의 지배하에 놓으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의 한 방편으로 투르크와 아랍계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델리에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인도인들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델리는 갠지스 강 유역과 중부·서부 인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세력들은 번갈아가면서 델리에 왕국을 세우고 술탄(sultan:이슬람의 왕)임을 자처했는데, 이들 왕조를 델리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이 왕조는 13세기부터 16세기 무굴제국이 들어서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를 주도했다.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는 이슬람교도 지배자로서는 최초로 델리에 웅대한 궁전과 모스크(이슬람 사원) 및 거대한 탑(minar)을 세웠다. 그는 북인도를 더이상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확장으로 보지 않고 델리를 수도로 하여 인도에 본격적인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이 왕조는 그 후계자들이 쿠트브 웃 딘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궁정 노예 출신이거나 그 직계 자손들이므로 노예왕조(1206~90)라고도 불린다. 그의 아들 일투트미시는 술탄의 위치를 더욱 강화하고 불만세력이던 투르크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대외적으로는 1220년에 인더스 강 유역의 북부 변경지방을 병합하고, 그 지역의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았다. 나아가 그는 1225년에는 벵골을, 1228년에는 신드 지방을 각각 점령했으며, 1229년에는 마침내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정식으로 술탄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29년부터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241년 서부 펀자브 지방을 잃게 되자 그 위세가 꺾였다.

 

노예왕조에 이어 1290년경부터 인도역사에 등장하는 또다른 투르크계 세력집단이 할지 왕조이다. 이 왕조는 알라 웃 딘 치세에 이르러 세력팽창의 절정기를 맞았다. 그는 동인도와 데칸을 성공적으로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1292년에는 야다바가 지배하고 있던 데바기리까지 공략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남인도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1306년 국내문제로 몽골 세력이 북인도에서 물러나자 구자라트와 말와를 수중에 넣었다. 나아가 그는 1310년 마침내 남인도를 원정하여 여러 지역을 성공리에 공략했다. 이제 알라 웃 딘의 영향력은 지배영역에 있어서나 그 세력에 있어서 어느 술탄국 지배자들보다도 강력했다. 그러나 알라 웃 딘의 야망은 북인도의 반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북인도의 구자라트·치투르·데바기리 등이 술탄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는데, 그도 1316년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알라 웃 딘의 사후 몇 년 동안은 계속 왕이 바뀌어 할지 왕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이다. 그는 1320년 술탄의 자리에 올라 투글루크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도 역대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제국을 꿈꾸었으나, 1398년 중앙 아시아의 몽골군이 티무르의 지휘하에 인도를 다시 침입하기 시작하자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인도에서는 티무르의 위임을 받은 사이이드 왕조와 그 뒤를 이은 로디 왕조 등이 명멸을 거듭하게 되고,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이 술탄국의 세력 약화를 틈타 난립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바마니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한편 남인도에서는 그들을 정복하려는 술탄국의 원정을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세력기반을 갖춘 왕조들이 나타났다. 우선 13세기말 후부터 200여 년 동안 북부 데칸을 지배한 바마니(1347~1527) 왕조가 있다. 또한 이 바마니 왕조보다 10여 년 먼저 한때 호이살라가 지배했던 남부데칸의 인도 남부에서는 비자야나가르(1336~1646) 왕국이 독립했다. 비자야나가르는 힌두 왕국으로, 1565년 1월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할 때까지 남인도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바마니와 비자야나가르의 경계선은 크리슈나 강이었다.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 한 데칸과 남인도의 상호 정복전쟁은 14세기에 재개되었다. 이 영토쟁탈전은 비옥하고 광물자원이 풍부한 라이추르도아브 지역을 서로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거기에다 골콘다의 다이아몬드 광산도 서로 탐내는 지역이었다. 14~16세기초에 남인도 역사는 실로 이러한 투쟁과 여러 군소왕국들의 정치적 변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볼 때 비자야나가르와 바마니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358년부터 시작된 라이추르도아브 쟁탈전은 그후 양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정복함으로써 남부 변경지역을 평정했으나, 동쪽의 해안국들과 오리사·와랑갈 등에 대한 지배력은 전보다 약화되었다. 나아가 비자야나가르가 고아 지방을 정복한 것은 무역을 통한 이익증대를 떠나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동부 해안지역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 지역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급변하는 남인도의 정세와 바마니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이었다.

 

반면 바마니 왕국은 15세기 후반부터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국내외적 정치상황에 대처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총리 마흐무드 가반이다. 그는 우선 구자라트의 도움을 받아 북부 변경지대에서 말와 세력을 축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가반은 비자야나가르로부터 고아를 재탈환함으로써 무역활동을 통한 세입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반이 반대파의 암살로 제거되면서, 왕국의 힘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마니의 국력은 비자야나가르의 잦은 침입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1538년 바마니 왕국은 마침내 비자푸르·골콘다·아메드나가르·비다르·베라르 등의 5개 나라로 분열되었다. 가반의 죽음을 계기로 바마니 왕국이 쇠잔해져 갈 즈음 비자야나가르는 상대적으로 남인도에서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크리슈나 데바 라야(1509~30)의 재위시에는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이 비자야나가르도 1565년 탈리코타 전투에서 북부 데칸의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들은 끝내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남인도를 침식해 들어온 이슬람 왕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슬람교도 세력이 제국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무굴 제국이다. 이 기간 동안 인도아대륙에서는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가 서로 융합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관련되는 여러 종교의식이 서로 혼합된 것은 그 한 예이다.

 

 

무굴 제국

 

무굴 제국의 성립과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의 기원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그의 후예 바부르(1483~1530)가 훗날 무굴 제국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티무르가 그때부터 이미 인도아대륙을 지배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사이이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 인도아대륙에 그의 영향력을 심어 놓았을 따름이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여러 해 동안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1526) 왕조이다.

 

무굴 혹은 투르크계 몽골 족장인 바부르가 인도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17년 무렵이다. 그러나 바부르는 어릴 때부터 한때 그의 선조들의 땅이었던 북부인도를 회복하려는 집념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야망은 사마르칸트 지역을 되찾으려는 노력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1491, 1503년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패함으로써 그의 꿈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영토회복에 자신을 갖게 된 것은 1504년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산을 가로지르는 이들 두 지역과 바다흐샨을 연결하는 지역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확보를 그 옛날 티무르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한 것에 비유할 만큼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한편 바부르는 1526년 4월 로디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이브라힘과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에서 접전을 벌여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이브라힘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들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몰아냈다(→ 색인:파니파트 전투). 바부르는 이 승리를 발판으로 델리에서 아그라로 곧바로 진격, 스스로 인도의 파드샤(역대 무굴 왕들의 칭호)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와 무더위에 지친 병사들은 그들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이때가 바부르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호소력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무굴에의 충성을 간절히 설득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와르의 라나 상가가 라지푸트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색인 : 카누아 전쟁). 이때도 그는 군사력에 있어서의 열세를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고, 라지푸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종족분열과 무굴 기병대의 신속한 전술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바부르는 파트나 근교의 고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군을 패퇴시키고 비하르 지방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또한 벵골의 이슬람 술탄으로부터도 충성을 확인받았다. 이제 그는 서쪽의 야무나 강으로부터 바다흐샨과 카불을 거쳐 동쪽은 벵골, 남쪽은 나르마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대제국 무굴의 초석을 닦은 동시에 그 시조가 되었다.

 

무굴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부르였다면 이 왕조를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악바르(1542~1605)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군사 책략가였다. 악바르는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인간적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신속한 기동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지도력에 힘입어 무굴 제국은 1605년 그가 죽을 때까지 북인도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데칸과 벵골 만 및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현명하게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기보다는 결혼정책이나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힌두의 여러 세력들을 무굴 제국의 실질적 동반자로 흡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황제이자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실질적 융합에도 공헌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무굴제국의 쇠퇴

 

악바르 대제가 주변 세력들을 적절히 제어하고 제국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국제정치 역학상 일종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페르시아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유목민의 침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었으므로 무굴이 남인도를 제압하는데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굴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페르시아가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와 접촉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요소를 상당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악바르의 사후, 무굴 제국은 자한기르(1605~27)·샤자한(1628~58)·아우랑제브(1658~1707) 등의 치세를 거치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졌고, 대내적으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이 재연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강인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마라타인들은 매우 지적이고 배타적인 소수의 브라만과 다수의 농노 계층인 수드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영웅 시바지(1627~80)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무굴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세력을 고츠 산맥을 따라 서서히 남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더욱 세력을 키운 마라타족은 1738년 드디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델리 근교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말와 지방을 점령했다. 이로써 마라타 세력은 인도대륙의 한 부족국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인도 대륙을 넘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듯 강성해진 마라타도 1761년 7월 파니파트 대평원에서 마주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함으로써 더이상의 세력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색인:파니파트 전투). 이후 북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마라타 및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무굴 제국 등이 일종의 힘의 공백기를 맞으면서 혼란과 분열을 거듭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인도대륙을 넘보기 시작한 세력이 유럽 열강들이었다.

 

 

유럽의 팽창과 인도

유럽 제국의 인도 진출(1498~1760경)

유럽은 인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이 필요로 하는 향료와 직물 및 그외의 진기한 동양상품들이 인도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색인:국제무역). 즉 상업적 이익 때문에 인도는 유럽의 주요 관심대상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향료는 특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향료는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는 작용이 있어, 육류를 즐기는 유럽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와 유럽 간의 무역은 중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2가지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몽골과 투르크의 침입으로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고 있던 육로가 차단되었고, 나아가 이집트를 통과하는 해로까지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당시의 국제적 긴장관계는 이슬람 세력의 타도를 위한 십자군의 원정과 향료를 독점하려는 상업적 열망을 더욱 부채질했고, 마침내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색인:탐험의 역사). 포르투갈인들은 월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곧 아랍 상인들을 제압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후 포르투갈의 천재적 영웅 아포노 알부케르케는 비자푸르의 술탄으로부터 인도의 서안지방인 고아를 탈취하여(1510) 이곳을 동방 포르투갈령의 수도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인도대륙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유럽 세력은 포르투갈인 셈이다. 하지만 얼마 뒤 포르투갈은 1세기 동안이나 대립관계에 있던 스페인에게 점령당함으로써(1580)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이어 인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이 차례로 인도에 들어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무역독점 경쟁에 나섰다. 특히 세계무역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각축전은 치열했다. 그러나 7년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어 카르나티크 전쟁(1744~48, 1750~54, 1758~63) 및 플라시 전쟁(1757)에서도 프랑스가 영국군에게 대패함으로써 제국간의 식민지쟁탈전에서 약자의 위치로 전락했다.

식민지 지배의 확대

카르나티크와 벵골의 지배권 확보에 성공한 영국은 이를 발판으로 점차 인도아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각 지역 세력집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남부인도의 마이소르는 인도의 장래에 미칠 영국의 위협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감지하고,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꾀하는 한편, 국내외의 여러 나라와 연락을 취해 우방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내정개혁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의 어수선한 인도 정치상황을 고려해볼 때 극히 이례적인 참신한 개혁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이소르의 노력도 주변 국가들의 외면과 영국군의 침입(1799)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은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와의 동맹관계로 인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마이소르를 간단하게 격파해버렸던 것이다(→ 색인:마이소르 전쟁). 이때 그들의 영웅 티푸(1782~99 재위)도 세링가파탐 전투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전사했다. 전쟁 후 마이소르의 옛 영토는 대부분 영국과 하이데라바드 및 마라타에 분할 병합되었다. 이 보다 앞서 1798년에는 마라타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하이데라바드도 영국과 군사보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이 나라 또한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한편 북인도에서는 마라타 동맹과 시크 세력이 영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의 위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오우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 비대해진 마라타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의 이런 정책이 가시화된 것이 이른바 로힐라 전쟁(1774)이다. 1774년 영국군의 원조하에 오우드군은 로힐칸드를 무력 침공하여 이를 병합했다. 이를 계기로 오우드는 마라타와 영국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영국의 세력하에 놓였다.

 

영국이 오우드를 강화함과 동시에 이를 속국화하려 하고 있을 때, 마라타 동맹은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1772년 이후의 페슈와(Peshwa:총리) 계승문제를 둘러싼 내분은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비화되었고,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등 외부세력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른바 제1차 마라타 전쟁(1775~82)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그 성격상 유럽 열강과 토착세력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시작되고 있던 마라타 동맹의 내분에 외국세력이 가세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호시탐탐 인도 국내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찾고 있던 영국측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영국은 전략 요충지 살세트 섬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라타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후계 문제를 둘러싼 각 세력집단간의 갈등으로 또다시 영국의 개입을 불러들였고(제2차 마라타 전쟁:1802~05), 마침내 1818년 마지막 남은 홀카르가도 영국과의 군사보호조약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의 카슈미르·펀자브·신드 등도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모두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신드 병합(1843. 8)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독립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던 시크 왕국도 란지트 싱의 죽음을 계기로 야기된 후계자 다툼의 와중에서 영국의 재물이 되었다. 1·2차 시크 전쟁(1845~46, 1848~49)에서 내부 분열 끝에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도의 거의 전지역이 영국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영국은 거대한 인도대륙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영국의 지배와 인도사회

폭동과 반란(1857~59)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비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색인:인도반란). 우선 종래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왕가(王家)나 지방 세력가들의 불만이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식 합리주의의 도입은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생활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반영(反英) 분위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폭동이나 반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185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커다란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드디어 불을 당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평소 민족적 자존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대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영국인과 충돌이 잦았었다.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델리에서는 성 안의 세포이와 시민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순식간에 반란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명목뿐이던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안팎에 선언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반란 동참을 호소했다. 이렇게 하여 델리에서 독립의 횃불이 솟아오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란은 인도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반란은 단순한 세포이의 폭동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농민과 일반 시민 등 전사회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우드의 러크나우칸푸르가 그 중심지였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반란은 북부·중부 인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비화되어, 영국의 인도 지배는 바야흐로 붕괴에 직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란군측에도 많은 약점이 있었다. 우선 반란군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고, 효과적인 전략이나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단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모여든 감정적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만한 지도력이나 서로간의 유대감도 희박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들을 진압할 구체적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곧 전투의 주도권을 영국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9월에 들어 델리를 다시 빼앗겼다. 이때 자행된 영국군의 파괴와 학살 행위는 그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델리에 이어 영국군은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얼마 동안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네팔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반면 반란군측은 차츰 내부 분열에 휩싸여 내적 통일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1858년 3월 캠벨이 지휘하는 7만명의 영국·네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격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러크나우마저 함락되었다.

 

이 반란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초래된 많은 문제점들이 이른바 연쇄반응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방향을 상실했고, 시대착오적인 왕정복고를 꿈꾼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적어도 식민지 지배에 대항할 민족주의적 반항의 씨앗이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이 사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인도인들도 관공서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또한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간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내각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 하부기관으로 15명으로 이루어진 인도 참사회가 구성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대두

영국인들의 지배가 확대되고 견고해질수록,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들의 민족의식도 깨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의 국정 참여 범위를 확대시켜달라는 정도의 소박한 요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종교와 사회 전반의 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최초의 종교·사회 개혁 운동은 벵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브라마 사마지(Brahmo Samaj)이다. 일종의 종교적 결사체인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람모한 로이이다. 그는 벵골의 비슈누파 브라만가에서 태어난 정통 힌두교도였으나 이슬람 및 서구 사상도 공부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에 일신교적 색채를 부여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힌두교도의 전통적 관습 및 종교의례 등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유아혼(幼兒婚)의 폐지와 교육의 기회 균등, 이혼의 자유, 과부의 지위 개선 등 불합리한 사회제도 및 관습 전반에 대해 비판하고 나아가 철폐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그는 카스트 제도의 철폐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브라마 사마지는 이후 데벤드라나트 타고르(1817~1905)와 케샤브 찬드라 센(1838~84) 등을 지도자로 받아들여 교육의 기회 개방, 병원 등 후생시설의 건립 및 그밖의 사회봉사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 유사한 사회 개혁단체로 구자라트 출신의 다야난다 사라스바티(1824~83)가 주도한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가 있다. 그는 브라마 사마지가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받았던 데 비해 고유의 힌두교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인도인들의 종교 순화에 힘썼다. 아리아 사마지도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 특히 교육수준의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인도 고대문화에로의 복고적 성향 때문에 민족주의적 저항을 뒷받침하는 사상으로서 훗날 인도의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도 같은 경향의 운동단체로서 베단타 철학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상을 접목한 라마크리슈나 선교회, 미국에서 설립되었으나 인도의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지학협회 등이 있다. 이들의 개혁운동은 종교적 배경과 그 추구하는 이념이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모두 종래의 화석화된 힌두교 교의와 전근대적인 사회 관습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인도 고전사상의 재인식과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인도의 일체화를 꿈꾸고 있던 도시의 중간계층이나 지식인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점에서도 이들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각성은 그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를 그들의 민족지도자로 맞이하게 되면서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국부(國父)로 전세계적인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비폭력무저항주의(ahimsṃ)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사상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유럽열강들의 인도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의 전분야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그후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 영국인들의 직접적·간접적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인들의 언어나 생활관습의 변화까지도 초래할 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영국인들의 진출 거점이었던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봄베이(지금의 뭄바이)·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등을 중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서구식 사고를 겸비한 신중간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교육·종교·저널리즘 및 사상에 있어서도 영국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 사상에도 접할 수 있었던 만큼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사회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재판소·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다시 말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지 인도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결과 변호사·의사·교사 등의 직업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계층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사회조직의 최상층부는 영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특권과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차츰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한계와 민족적 일체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민족운동의 저변에는 이러한 신교육세대 및 새로운 직업계층의 인도인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동류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 신교육세대가 중심이 되어 훗날 반영 민족주의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또한 이들 중에서 장래의 인도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간디·네루 등의 예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받은 사회적·문화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유문화와 사상을 간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인도가 현대와 고대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인도인들의 가치관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독립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자극받은 인도인들은 범국민적인 반영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선두에는 간디가 서 있었다. 영국제품 불매운동, 물레의 장려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전인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인도인들은 조국애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색인:아힝사, 보이콧). 이러한 간디의 민족주의운동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영국은 강압정책을 병행하면서도 차츰 인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인도의 연방화를 논의한 원탁회의(1930~32)와 뒤이어 공표된 1935년법 등이다. 이 법은 전인도의 연방제 지방자치의 허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연방제의 구상에 대해 인도 국민회의측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와 각 지역을 대표할 책임정부 및 연방입법부의 선거방법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 영토 편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실질적인 자치권의 확보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인도 전역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각 정파간에도 알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내외적 여건은 인도의 독립에 밝은 빛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우선 영국의 정권 교체와 이에 따른 정책 변화를 들 수 있다. 영국은 1945년의 선거에서 보수당이 퇴진하고 노동당이 새로 정권을 잡았다. 노동당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도의 독립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족주의운동 단체들이 인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영국측에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인도의 독립을 점점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영국의 애틀리 정부는 1947년 2월, '1948년 6월 이전에 책임 있는 인도인 단체에게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국민회의파 중심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반은 네루가 맡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힌두교도들과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사상자도 7,000여 명에 달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에는 2개의 공화국, 즉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과도기적 임시정부 형태였지만 3년후인 1950년 인도는 완전 독립했다. 한편 파키스탄은 1956년 이슬람 공화국을 선언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두 나라는 민족적인 갈등과 종교문제로 끊임없는 분쟁에 휩싸여왔다.

 

19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을 시행해 주권재민의 연방제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연이어 제1회 총선거가 소선거구제로 실시되어 국민회의파는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굳혔다. 1951년 4월에는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어 토지개혁의 추진과 함께 공업화계획이 본격화되었다(→ 색인:산업화). 제1차 5개년계획은 농업 면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내정 면에서 주목받는 것은 1955년 1월에 시작된 국민회의파대회에서 인도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형 사회'가 설정된 점이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엄밀히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루 정권은 대외적으로 비동맹외교정책을 내걸었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평화5원칙을 고수했다.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네루는 이집트의 나세르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1956)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언어별 주(州) 재편성의 도입(1956)으로 하나의 전기를 맞이했다. 인도가 많은 언어와 민족으로 구성된 이상 언어별 주행정구역의 확정은 인도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독립 인도의 정치사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즉 제2회 총선거로 신설된 게랄라 주에서 인도공산당이 제일당이 되어 몇몇의 다른 좌익정당과 연합해 주 정부를 장악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좌익성향의 게랄라 주정부는 1959년에 대통령중심제가 도입될 때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며, 국민회의파 중앙정부가 내건 정책의 혁신적 부분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네루를 선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이 '좌익정권'의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고 대외적으로도 티베트 문제에 대해 내정불간섭원칙을 버렸다. 1962년에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 발생한 군인간 무력충돌 결과 인도군의 패배는 네루의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인도의 제2차 5개년계획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색인:중국-인도 국경분쟁). 1964년 네루의 사망은 인도의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7년 인도정치는 전독립 인도사에서 전환점을 맞이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제4회 총선거의 결과 종래의 연방과 여러 주를 장악한 국민회의파의 일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연방은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주는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정부가 서벵골과 게랄라의 두 주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타밀나두 주에서는 드라비다 진보연맹이 국민회의파를 누르고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대해 인디라 간디 총리는 강권정치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모색했다. 즉 인권탄압과 주 자치의 핵심을 제거하는 것이 그녀의 기본전략이며 관리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생활불안이 만성화하는 가운데 1975~77년 비상사태선포를 강화해 인도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7년 제6회 총선거 결과 독립 후 만년 여당이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처음으로 패배하고 대신 자나타(인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자나타당에 거는 민중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자나타당은 비상사태 이전으로 정치를 되돌린다는 의지가 약했다. 자니타당은 애초부터 당내의 권력투쟁에 시간을 허비하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침내 1978년 인디라 간디가 정계로 복귀했고, 1980년 제7회 총선거에서 재집권했다. 기적적으로 정계로 복귀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이전처럼 강권정치를 속행했다. 1980년대 펀자브 주의 시크교도는 일제히 국민회의파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녹색혁명의 모범적인 주로 간주된 펀자브 주가 농업 중심의 주로 고정되어 공업투자가 보류되자 시크교도들 사이에는 카스트 신분제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만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 1984년 6월 시크교도 가운데 일부 과격파가 굳게 버티고 있는 시크교도 총본산에 대한 정부군의 무력진압은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 총리에는 그녀의 맏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취임했다. 국민회의파 정권은 외국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내의 독점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계급을 기본적인 지지세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또다른 혁신정책이 마련되지 않아 이들은 국민회의파에서 유능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을 견제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회의파가 펼친 정치적 현실이 인도의 모든 정치적 현실은 아니다. 1967년 이래 인도정치의 다원적 지도와 민주화의 진행은 서벵골 주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전선정부의 지속적인 정치활동으로도 확인된다. 서벵골 주 민중의 생활향상과 민주화에 대한 확대된 요구는 인도정치에 발전과 활성화를 가져다준 계기가 되어 전인도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89년에 네루 일가(인디라 간디와 그 아들 라지브 간디)의 권력독점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비스와나스 정권은 1990년 종교 분쟁과 계급갈등으로 인한 집권 국민전선의 붕괴로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의 지지로 셰카르가 정권을 승계했으나 1991년 3월 국민회의파의 간섭과 비협조를 이유로 사임했다. 그 결과 벤카타라만 대통령이 하원을 해산했고 같은 해 5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총선의 선거 유세 과정에서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남부에 갔다가 테러리스트의 총격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는 동정표가 급증하여 과반수 의석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제1당의 위치를 확보했고, 1991년 6월 21일 제9대 총리에 라오 국민회의파 총재가 취임했다(→ 색인:인도 국민회의당). 그러나 1992년 12월 6일 과격 힌두교도의 아요디아 시 소재 바브라 회교사원 파괴로 종교분쟁이 확산되었다. 이 분쟁으로 1,000여 명 이상이 사망하고 분쟁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인접 이슬람교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S.A. Wolpert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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