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자마을 여행기(훈자 장수마을에서 하룻밤)훈자마을 여행기(훈자 장수마을에서 하룻밤)

Posted at 2010. 5. 30. 18:19 | Posted in 해외여행정보/인도,네팔,파키스탄

2007 4. 파키스탄 훈자 장수마을.

세계적인 장수마을 훈자는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이 만나는 카슈미르 계곡에 숨어 있다. 좌우에 늘어서서 훈자를 내려다보는 산봉우리들은 대부분 해발 6000m가 넘는다. 계곡을 메운 빙하는 세월조차 얼린 듯 새하얗게 멈춰섰다. 만년설 끝자락이 녹아내려 만든 옥색 강물은 굽이굽이 계곡을 따라 흐른다

<옛 훈자 왕국의 발티트 성. 훈자왕국은 1947년 파키스탄에 복속돼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있다. 발티티성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훈자왕은 인근에 새로 지은 거처에 기거하고 있다. 2007년 영국 찰스 왕세자가 방문하기도 했다.>

<발티트 성에서 내려다 본 훈자 마을 전경>

끝없이 이어지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어느새 살구꽃과 벚꽃이 만개한 별천지가 펼쳐져 있다.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소개한 '도원경(桃源境)'이 바로 훈자라고 한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해 훈자까지 오는데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더 걸렸다. 원래는 2∼3일 걸리는 거리지만 취재일정 때문에 가이드를 다그쳐 강행군을 했다. 현지 가이드는내 평생 이렇게 급한 스케줄로 훈자에 오긴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훈자의 중심도시 카리마바드. 이곳이 소위 장수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높은 산 빙하가 한껏 머금었다 토해내는 공기가 상쾌하게 가슴 속 깊이 파고 든다. 맑은 시냇물 소리도 귀를 즐겁게 해준다. 하지만 마을 곳곳에 있는 오르막길은 몇걸음만 발을 옮겨도 숨이 차 오르게 만든다. 훈자마을이 워낙 고산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약한 정도의 고산병이라고나 할까. 가이드 말에 따르면 카리마바드는 해발 2500m 이상 고지대여서 외지인은 흔히 이런 걸 느낀다고 했다.

 훈자 마을은 아담하다. 집들은 흰 벽이 깨끗하고 신작로는 잘 관리돼 있다. 집집마다 돌담을 예쁘게 쌓아올려 마을 구석구석 이어진 돌담길이 정겹다. 산과 마을, 사람들이 잘 어우러져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의 동방 정벌 때 이곳을 지나던 병사들 일부도 이 풍광에 반해 그대로 눌러앉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훈자 주민 가운데는 파란 눈, 금발이 많다.

양인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닌 이들의 모습은 신비감을 더한다.

<훈자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훈자에는 거지가 없다. 모든 주민이 일을 하기 때문이다. 훈자에서는 대대로 부모들이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토지를 나눠줘 경작하게 한다. 놀고먹는 사람이 없으니 범죄율도 낮다. 살기 좋은 곳엔 오래 사는 사람도 많은 법. 와지드 울라백 훈자 촌장에 따르면 훈자 지역 전체인구 약 65000명 가운데 100세 이상 주민은 150여 명에 달한다. 카리마바드는 주민 15000명 중 20여 명이 100세 이상이다.

 훈자 주민의 장수비결은 무엇일까. 이들은 기력이 닿을 때까지 일하는 것을 최고의 장수 비결로 꼽는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91세의 클비 알리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목수 일을 했다고 했다. 그는 80세가 돼서야 은퇴했다. 이후 스스로천직'이라고 여기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요즘도 하루 3∼4시간씩 밭에 나가 일을 한다. 91세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힘이 넘쳐 보였다.

장수 비결을 묻자 알리 할아버지는 손사래부터 친다.

 "내 나이는 많은 것도 아닌데 무슨 장수비결이야. 그냥 많이 걷고 열심히 일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어. 나는 젊었을 때 하루 15㎞ 정도를 예사로 걸어다녔지."

<힌두쿠시 산맥의 험산준령 아래 자리잡은 훈자마을 밭에서 일하는 글루아팅 할아버지. 그는 이날 즉석에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103세 노인과 며느리, 손자. 이 할아버지는 손주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훈자의 장수 비결을 얘기할 때 노동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게 음식이다. 훈자인은 통밀가루로 만든 빵 '차파티'와 감자, 치즈, 야채, 과일 등을 주식으로 한다. 특히 살구를 좋아하는데 마을 어디를 가나 살구나무가 있다. 훈자인들은 살구를 말려 1년 내내 간식으로 먹고, 살구씨에서 기름을 짜 몸에 바르기도 한다. 고기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밭에서 만난 알람기르 글루아팅 할아버지가 즉석에서 집으로 초대하는 바람에 훈자의가정식 백반을 체험할 수 있었다. 64세로 이 동네에선젊은 축에 더는 글루아팅 할아버지는 20평 남짓한 집에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는 환기 구멍이 뚫려 있고 바닥엔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은 색은 좀 바랬지만 파키스탄제 답게 문양이 몹시 화려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부지런히 음식을 내왔다. 말린 살구와 사과, 차파티, 이름 모를 음식들 십여 가지가 금세 쌓였다. 며느리가 홍차 처럼 보이는 훈자 전통 차를 권했다.

 글루아팅 할아버지는 어느새 정장(?)를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세탁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하얀 망토를 점잖게 어깨에 두르고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양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두세 살쯤 돼 보이는 손자 세 명이 연방 할아버지 무릎을 오르내리며 재롱을 피웠다. 글루아팅 할아버지는 차려진 음식을 가리키며장수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먼지가 앉은 살구와 말라 비틀어진 사과는 그다지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비위생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게 장수 비결이라니….’ 가장 큰 놈을 집어들고 한 입 덥석 베어 물었다. 몸에 좋은 것은 쓰다고 했던가. 훈자 살구는 쓰진 않았지만 기대했던 단맛도 없었다. 그래도 인사치레도맛있다고 몇 번을 얘기해 주었다. 글루아팅 노인은 자신들의 음식에 대한 이방인의 평가가 만족스러운 듯이것저것 더 먹어 보라며 음식 접시들을 모두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정확히 훈자 음식의 무엇이 이들을 건강하게 만드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훈자 식단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장수할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는 나와 있다. 오래전 인도국립영양연구소의 마카리손 박사가 생쥐 3000마리를 세 그룹으로 나눠 각각 훈자·인도·영국 음식으로 사육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 실시 2년 뒤 차파티와 살구, 양배추 등 훈자식으로 사육한 쥐 그룹에서는 질병이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쌀과 향신료, 육류를 섭취한 인도 그룹에서는 표본의 절반이 충치와 간염 등에 시달렸고, 흰빵과 햄 등으로 사육한 영국 그룹 쥐는 거의 모두 질병이 발견됐다고 한다 

  훈자인은 '자기들만의 것을 지키면 오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지키고 있다. 그 어떤 약이나 첨단 의료기술보다 자신들의 생활습관 속에 장수의 비결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평균수명이 줄어들고 있지만, 이는 모두 외부 영향 탓이라고 말한다. 외지에서 들여온 음식과 문화가 훈자인의 식생활 등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식수로 이용하는 훈자 강물은 석회질 등 빙하에서 떠내려온 불순물이 많아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조상이 그대로 마셨고, 그러고도 장수했기 때문이다.

<훈자 여성들이 마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기르고 있다. 이 물은 훈자마을 뒤 울타 피크의 빙하가 녹은 물로, 석회 성분 등 불순물이 포함돼 있어 타지역 주민이 마시면 탈이 나기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자는 철저히 '그들만의 세계'. 주민들은 외부 영향을 극도로 싫어한다. 심지어 결혼도 자기들끼리 하는 것을 선호한다. 근친혼으로 인한 장애인도 많이 생겨났다. 훈자인들은 이들을 정성껏 보살핀다. 남달리 왜소하거나 정신지체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마을 곳곳에서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나라'가 나온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 본 '불사(不死)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얘기다. 하지만 걸리버가 만난 이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늙지도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사람들'은 늙어서 기력도 없고 사회적 역할도 없어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심지어 가족들에 의해 버려지는 사람도 있지만 죽을 수가 없었다. 만나기 싫은 사람도 계속 만나야 했고, 보기 싫은 꼴도 계속 봐야 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이들에게 영생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다.

'도원경' 훈자에선 얘기가 다르다. 훈자 주민들은 무엇이 진정 행복한 장수인지를 보여 준다.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일하다 때가 되면 운명을 받아들이니 그야말로 '지상천국' 아닌가.


[출처] 훈자 장수마을에서 하룻밤|작성자 until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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