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서 살인 누명 쓰고 수감됐다 가석방된 한지수씨온두라스서 살인 누명 쓰고 수감됐다 가석방된 한지수씨

Posted at 2010. 6. 14. 20:55 | Posted in 여행을떠나자/해외여행정보,이민

온두라스서 살인 누명 쓰고 수감됐다 가석방된 한지수씨

레이디경향 | 입력 2010.06.14 15:28

지난 2008 6, 스킨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따기 위해 온두라스로 떠났던 한지수씨(27)는 한 네덜란드 여성의 사망 사건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온두라스에 구속 수감됐다. 국내에 전해진 그의 이야기는 네티즌들의 구명운동으로 이어졌고 뒤늦게 나선 정부의 도움으로 지난 12월 악몽 같은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가석방 된 그는 현재 가택 연금 중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가석방 후 6개월,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한지수씨의 근황을 들었다.

가택 연금 중인 한인교회에서. 천신만고 끝에 만난 아버지 한원우씨와 언니 지희씨.

Q
지난 12월 가석방 이후 어느덧 6개월이 다 되어갑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
가요?

저는 지금 가택 연금 보증인이었던 박명하 목사님께서 담임목사로 계신 온두라스 한인교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인교회 밖으로는 나갈 수 없지만, 다행히 교회가 큰 편이라 감옥보다는 덜 답답합니다. 교인 분들과 선교관에서 아침저녁으로 배드민턴을 치는데, 그 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닭장 같은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니까 무척 편합니다. 사진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감옥 침대가 낮아 허리를 펴고 책을 보지 못했고, 침대 매트도 스펀지라 등 쪽 근육이 많이 뭉쳤습니다. 불시 검문과 감옥 내에서의 소동으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과 운동 등으로 건강이 많이 회복된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 인터넷선이 깔려 있어, 인터넷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온두라스 특성상 회선이 불안정할 때가 많습니다.

Q
가석방 판결이 나는 순간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심리에는 저와 변호사, 검사만이 들어갔습니다. 모두 스페인어로 진행되어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는데, 심리 내내 두 손 잡고 기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특히, 판사가 결정문을 읽을 때 "Iglesia Coreana"라고 하며 박명하 목사님 이름을 거론할 때, 가석방 판결이 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계속 눈물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기쁜 감정도 있었지만, 3개월간 함께 고생한 아버지 생각이 나고 또 죄송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일반 가석방이 아닌 가택 연금이었지만, 검찰 측의 반대가 워낙 심했던 터라 그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Q
검찰 측이 즉각적으로 항소를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재판이 진행되나요?

현재 3월에 열린 3차 심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채, 담당 판사가 바뀌어 3차 심리가 다시 열릴 예정입니다. 온두라스는 이처럼 모든 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언제 무엇이 변경될지 모릅니다. 앞으로 3차 심리가 끝나면 본 재판이 열립니다. 아직 재판 날짜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변호사 말에 따르면 검찰의 항소 역시 더디게 진행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Q
지수씨가 맨 처음 온두라스에 간 게 2008 6월입니다. 2년 전의 온두라스와 현재 온두라스가 지수씨에게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2
년 전,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막연히 즐거운 상상만 하며 온두라스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 무장 경찰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삭막하고 무섭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로아탄 섬에 도착해 맑은 바다와 순박한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놓였습니다. 원했던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따는 것이 좋았고, 날씨도 좋고, 자연도 아름다운 곳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은 이 아름다운 나라가 마냥 아름다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당시에 몰랐던 것들(정치적인 불안정성, 신문기사에 연일 보도되는 끔찍한 살인사건, 대낮에 걸어 다니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온두라스는 저에게 너무 많은 슬픔과 아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즐거운 기억도 있지만, 저에게는 아무래도 힘들고 무서웠던 기억이 더 많습니다.

라세비아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지수씨가 지내던 방과 부엌.


Q
사건 당시 목격자로서 참고인 자격으로 법원에 진술하며 사건에 휘말리게 됐는데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당시만 해도 사망사건이었지 살인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증인으로 설 때도 불안해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맨 처음 체포되었던 곳이 이집트였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나요?

이집트 공항에서 붙잡혔을 당시, 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디에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휴대폰 발신이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나마도 곧 빼앗겼고, 인터폴 사무국과 법원 등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결국 감옥에 보내졌습니다. 카이로 감옥에는 3주간 있었지만, 3주가 저에게는 진정 30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매트리스도, 이불도 없는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다가 목이 돌아간 적도 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의 생활은 1 1초가 괴로웠습니다. 7일 후, 저와 함께 있었던 한 수감자가 밖에 나가서 언니에게 연락을 했고 언니가 이집트 대사관에 연락했으나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대사관에서는 서류가 온두라스로 넘어간 상태라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했고, 온두라스로 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송환 당일, 체포 첫날 끌려갔던 인터폴 사무국으로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온두라스 인터폴 담당자 2명을 만나 카이로 공항으로 갔습니다. 3주 전에 붙잡혀서 나가지 못했던 그 공항을, 그렇게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Q 2008
년 여름에 사건이 발생하고 1년 동안 한국과 미국, 이집트를 오간 지수씨의 입출국에는 아무런 제재가 없었습니다. 1년 만에 갑자기 체포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보십니까?

이집트와 온두라스는 범인 인도 협정조차 맺어져 있지 않습니다. , 제가 이렇게 끌려온 것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온두라스에 있는 네덜란드 세력이 본국과는 상반되게 쿠데타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네덜란드 세력이 쿠데타 집권 시기를 틈타 검찰과 인터폴을 매수해 저의 온두라스 송환을 추진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Q
온두라스에서의 수감생활은 어땠습니까?


아버지께서 워낙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 교도소장에게, 그리고 여자 교도소 방장에게 잘 부탁한다고 간곡하게 부탁하셨습니다. 면회 오실 때마다 교도소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음료를 돌리고 하여 많이 인심을 얻었습니다. 그 덕분에 다행히 저는 무탈하게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평소 교도소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특히 남자 교도소 쪽이 심했는데, 하루에 두 번 매점을 갈 때가 가장 무서웠습니다. 남자 수감자들은 흉악범이 많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 여자 수감자가 남자 교도소 쪽에서 살해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남자 교도소 쪽에서 폭동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높은 담벼락 때문에 아무것도 보진 못했지만, 감시대에 있는 유리창들이 모두 깨지고, 총소리도 들렸습니다. 담을 넘어 깨진 유리, 벽돌 등이 날아왔습니다. 시도 때도 없는 검문과 폭동으로 밤이 조용한 날은 많지 않았습니다
.

Q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 감옥에서, 그것도 언제 나갈지 모르는 미결수 신분으로 영어(
囹圄)의 몸이 된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또 어떻게 버텨냈는지 궁금합니다.

체포 초기(이집트 감옥)에 극심한 충격을 받아서인지, 라세이바 감옥에서 지내는 것은 차라리 쉬웠습니다. 열악하나마 이부자리라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있다는 것이 무척 좋았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있는 면회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던 것 같습니다.

Q
한지수씨 사건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 데에는 네티즌들과 트위터 사용자들의 구명운동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알고 계셨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 감옥에 오셔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언니가 올린 글 덕분에 언론사와도 접촉이 되었고, 제 친구가 트위터를 만들어주고 활동해서 한국에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찼습니다. 어떻게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서서 나를 도와줄까, 하고 감사하며 신기했습니다.


Q
정부에서 전문가팀을 파견한 것이 지난 12월입니다. 지수씨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전까지 정부의 무심한 태도에 원성이 높았습니다. 타국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절망이나 정부에 대한 원망은 없었는지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미약했던 정부의 지원이 아쉬웠습니다. 감옥에서 하루라도 보내봤으면 알 것입니다. 그 철창 밖으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여론의 비난을 막는 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저희 가족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제 케이스는 다행히 많이 알려져서 이 정도나마 도움을 받고 있지만, 사실 정부에서 해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없어진 후 가족이 이집트 대사관에 연락했지만 이집트 대사관은 7일 동안 제가 있는 곳을 찾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온두라스 대사관으로부터 변호사를 추천받았지만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대사관 직원이 아는 변호사였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와줄 바에야 차라리 안 도와주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지금 정부에서 많은 신경을 써준다고는 하나, 제가 현지에서 느끼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대사관에서 저에게 연락해 묻는 것은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가 아니라 "일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느냐, 왜 진전되지 않느냐"는 다그침입니다. 온두라스의 특성상, 일의 진척이 더딥니다. 그렇다면 대사관이 나서서 돕는 것이 제가 바라는 것인데, 대사관에서는 "너희 변호사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저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문제의 귀책이 아니라 해결입니다. 심지어 저는 대사관에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저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는 것은 나중에 받을 비난에 대한 면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라세이바 감옥에서 3개월을 지냈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아버지도 함께했습니다. 제가 가석방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였습니다. 대사관의 확인서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한지수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겠다'는 서류 한 장입니다. 그 서류를 해주지 않겠다고 해서 저는 그 3개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언론에 보도되고 여론의 도움을 받은 끝에 겨우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꺼내주고 본국으로 돌려보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 확인서 한 장 써주는 데 몸을 사리는 공무원을 보면서, '하루만 감옥에 있어보세요. 당신 딸이 하루만이라도 감옥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라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

Q
멀리서 지수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낙천적이고 씩씩한 아가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1년여의 시간을 돌아봤을 때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번 사건이 지수씨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기특하다고, 잘 해내고 있고 또 잘 해나갈 거라고 다독여주고 싶습니다. 어리석은 부분도, 미숙한 부분도 있었지만 분명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이번 일이 힘들었던 만큼, 배운 것도 많습니다. 이런 힘든 시간을 잘 버텨내고 있는 스스로가 자랑스럽습니다.
이 일이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모든 게 끝나고 몇 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

Q
일을 겪으며 가장 절망했던 순간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생각하기도 싫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2차 심리 결과가 발표되던 아침이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입니다. 2차 심리에서 "나갈 수 있다"고 변호사가 자신했기 때문입니다. 결과 발표만 남은 상태였기에 저는 짐을 다 싸서 기다렸습니다.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고 통보하던 변호사의 말을 듣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버지의 참담한 얼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가석방 심리가 끝나고 나서인 것 같습니다. 너무 기뻐서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

Q
현재 가장 염려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판이 늦어지는 것은 온두라스에서 으레 있는 일이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재판이 늦어지고 있는 사유가 비정상적인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크게 우려할 일입니다. 외부의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본 재판에서도 외부의 압력으로 아무 증거 없이, 혹은 거짓 증거로 제가 유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 범인 인도 협정도 맺어져 있지 않은 나라에서 인도되어 와서, 확실한 증거 없이 용의자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이처럼 온두라스는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와 같은 세력이 이런 허술한 점을 틈타 어떻게든 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여태까지 제가 겪은 일이니까요. 제가 겪었던 일들이 다시 반복될까, 그것이 가장 염려되고 걱정됩니다.
Q
지수씨가 하루빨리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우리 정부와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현지에서 대사관이 힘을 써야 합니다만, 지금까지 전적으로 볼 때 제가 이렇게 한마디 한다고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현지 사정에 능통하게 되어 재외국민의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저와 우리 국민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여름 이집트 다이빙 강사 시절.
Q 꿈을 펼치려 해외로 떠났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고통받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젊은 나이에 해외에 나가는 것은 이제 거의 일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우리나라가 해외여행이 이렇게 활발해진 것이 근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그야말로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입니다. 사전에 충분한 조사를 하고 가기를 바랍니다. 그냥 여행 정보만 찾아볼 것이 아니라, 현지 교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하는지를 물어보고 조사해 가기를 바랍니다. 여행자들은 아무래도 단기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교민들은 오랜 생활로 현지 문제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Q
자유의 몸이 되어 한국에 돌아온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여태까지 아버지께서 여러 곳에 신세를 져가며 엄청난 액수의 변호사 비용과 여행 경비를 부담하셨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면, 이 사건으로 발생되었던 제반 비용들을 갚고 상처를 딛고 일어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또 이제껏 제가 받았던 도움과 관심을 갚고 싶은 생각도 간절합니다. 생활이 안정되고 여건이 되면 제가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한지수 사건은?

2008
6 7, 한지수씨(당시 25)는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으로 꿈에 그리던 중미 온두라스로 떠났다. 스킨스쿠버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였다. 호주와 영국 이중 국적자인 다이빙 강사 댄 로스가 사는 집에 월세를 들어 살던 그는 그해 8 22일 댄과 함께 술에 취해 집에 온 네덜란드 출신 다이버 강습생 마리스카 마스트의 사망사건을 목격한다. 그날 새벽 화장실에 다녀오다 넘어져 앞니가 깨지고 눈썹 끝이 찢어진 마리스카에게 댄과 함께 응급조치를 취한 후 방으로 돌아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마리스카가 오물로 더렵혀진 침대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었던 것. 국립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마리스카는 곧 사망했고 지수씨는 경찰과 법원에서 참고인 진술과 증언을 했다. 경찰에 수감됐던 댄은 영국에서 온 변호사 누나의 도움으로 풀려나 종적을 감췄다.
사건 뒤 평상시처럼 생활하던 지수씨는 9 24일 자격증 시험을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그해 12월 이집트 다합으로 떠났다. 8개월 동안 이집트에서 스킨스쿠버 강습을 한 지수씨는 2009 8 27일 어머니가 계시는 미국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카이로 공항에서 여권심사를 받던 중 인터폴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당한 혐의는 황당하게도 '살인'이었다. 온두라스 경찰이 지수씨와 마리스카, 댄이 삼각관계이며 지수씨와 댄이 살인 공범인 것으로 추정하고 수배를 요청한 것이다. 지수씨는 3주 동안 카이로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9 22일 온두라스로 이송돼 라세이바 교도소에 갇힌다. 힘들게 가족과 연락이 닿았고 아버지 한원우씨와 언니 지희씨가 온두라스로 달려왔다. 지희씨는 동생의 억울함을 인터넷에 호소했고 네티즌들은 한지수 후원 카페를 통해 구명운동을 펼쳤다. "국가가 개인을 위해 신원보증을 서준 경우가 없고 선례를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며 지수씨의 신원보증을 거절했던 정부는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문제가 제기된 후 전문가팀을 온두라스 현지로 보냈다. 지수씨가 살인혐의로 체포된 지 3개월 만이었다. 지수씨는 12 15일 보석금 1만 달러를 내고 가석방 판결을 받았고 온두라스 검찰 측은 즉각 항소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

<■ 글 / 노정연 기자 ■ 사진 제공 / 한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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