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반]79위 강산에 ‘강산에 Vol.0’[한국명반]79위 강산에 ‘강산에 Vol.0’

Posted at 2010. 5. 30. 00:50 | Posted in 삶의한자락/미디어(영화,음악,TV)
기사입력 2008-06-05 17:19
ㆍ‘빠다’ 냄새 대신 ‘줏대’ 보여준 록

1992~93년 무렵은 여러모로 한국 사회가 급격히 변화한 전환기였다. 오랜 군사 정권이 마침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수립되던 시점이자, 냉전체제가 급격히 무너지며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한 지구화의 바람 속에 빠르게 편입되어가던 시점이기도 하다. 80년대 내내 민주주의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를 경험했던 한국 사회의 대중은 조금씩 정치와 계급, 이념 중심의 거대 담론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때맞춰 등장한 신세대 문화는 욕망의 정치학, 경박함과 쾌락주의의 미학을 앞세우며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다. 사회적 갈등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세상이 온통 혼돈으로 가득 차 보이던 그 즈음 대중음악계의 주류권은 랩과 댄스, 테크노 등의 키워드로 표현되는 신세대 트렌드가 온통 휩쓸고 있었다. 80년대식 거대 담론의 음악적 표현이었던 민중가요 진영은 조금씩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 때 등장한 강산에의 첫 번째 앨범은 혼돈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와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매우 적실하게 보여준 하나의 이정표와 같았다. 그의 음악은 주류권의 세계와도 거리가 있었고 민중음악 진영과도 구분되는 지점에 있었다.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는 분명 록 보컬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노래에는 그 흔한 ‘빠다’ 냄새가 쭉 빠져 있는 대신 줏대 있는 한국 청년의 기개가 담겨 있다. 사실 ‘한국적’이란 말만큼 애매모호한 말도 없지만 강산에의 록음악을 표현하는 데 ‘한국적’이란 수식어만큼 적실한 것도 찾기 어렵다. 그의 음악에선 한국적 정신과 정서가 느껴진다. 그것은 예컨대 “할아버지 그 하얀 수염 쓰다듬으시며 언제나 이웃 복덕방에 내기 장기 두러 나가셨지…”(‘할아버지와 수박’), 혹은 “올해를 넘기면 노총각 신세라고 시끄럽던 그 꺼벙이가 제일 먼저 장가가네 쾌지나 칭칭 쾌지나 칭칭나네 얼싸좋네…”(‘장가가는 날‘) 같은 토속적인 몇몇 노래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의 내면 풍경을 분명한 한국어로 또렷이 보여주고 있는 노래 전반에서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앨범의 압권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과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를 적절히 차용하면서 실향민의 아픔을 절실히 녹여낸 걸작 ‘…라구요’라 해야 할 것이다. 80년대 이래 수많은 통일가요들이 만들어졌지만 이만큼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당위를 절절히 드러낸 노래가 또 있었던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이 모두 매우 개성적이면서 견고한 음악적 구조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래말 하나하나의 결을 살리면서 록 음악 스타일을 완벽하게 녹여낸 작곡 솜씨는 물론, 당대 최고의 세션들이 결합한 연주도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Vol.0’라는 다소 삐딱한 숫자로 시작된 그의 음악적 행보는 이후 매우 자유분방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심미적 진지함을 잃은 적이 없다. 자유로운 음악적 여정의 씨앗이 이 음반에서부터 배태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강산에의 이 첫 번째 음반은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이 갖게 된 또 하나 걸출한 작가의 탄생을 알린 음반이었던 셈이다.

<김창남 |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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