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갈등 지도 - 팔레스타인]
聖地의 ‘종교적 숙명’이 부른 55년 피의 투쟁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 간 해묵은 갈등은 골이 매우 깊다. 양측은 팔레스타인 땅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전쟁과 평화협정, 암살과 테러를 되풀이해왔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이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세계의 테러문제 역시 뿌리 뽑기 힘들다. 팔레스타인은 영원한 분쟁의 땅인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반미(反美) 감정의 뿌리를 캐는 일에 있어 다음 몇 가지 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9·11 테러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족 알 왈리드는 뉴욕의 사건 현장을 찾아갔다. 파드(Fahd) 국왕의 조카가 되는 그는 국제적 사업가로서 200억달러 이상의 개인재산을 소유한, 세계 10위권 내의 거부(巨富)다. 그는 애도의 뜻을 표한 뒤 복구비로 뉴욕시장에게 거금 1000만달러의 수표를 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수표 전달식이 끝남과 동시에 알 왈리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테러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은 문제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미국은 중동정책을 재수정해야 합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좀더 균형 있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이 성명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9·11 테러사건의 근본원인은 미국의 중동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미국이 지나치게 이스라엘을 두둔했다는 것이다.
성명서를 전해들은 뉴욕시장은 알 왈리드에게 수표를 반려했다. 2001년 10월12일 뉴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명서 내용이 아랍세계의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알 왈리드의 성명서가 미국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자, 그의 아버지인 왕족 탈랄(Talal)은 아들을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랍세계가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것은 그 행동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친(親)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는 미국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탈랄의 말은 아랍인들의 반이스라엘 감정,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반미 감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셋째, 지금은 생사가 불분명하지만, 수차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전세계 TV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성명이다. 그의 인터뷰 전문(全文)을 면밀히 살펴보면 철두철미한 반이스라엘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미국을 증오하는 주된 이유는 미국이 친이스라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얼마나 반이스라엘적이냐 하는 것은 그가 이끄는 조직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알 카에다(Al Qaeda)’의 다른 이름은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의 세계 이슬람전선(The World Islamic Front for Jihad against Jews and Crusaders)’이다. 여기서 ‘유대인에 대항(against Jews)’한다는 말은 알 카에다 조직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십자군’은 미국을 뜻한다.
9·11 테러사건의 뿌리 중 하나는 분명히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대결과 갈등에서 찾아야 한다. 혹자는 ‘문명충돌론’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확대포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유대인)과 팔레스타인(아랍인) 사이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과 투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테러문제는 뿌리뽑히기 어렵고 테러와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반미 감정 뿌리는 反이스라엘 정서
오늘날 난마같이 뒤얽힌 중동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지금부터 55년 전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다. 1948년 5월14일 오후 4시. 이스라엘 텔 아비브의 박물관에서 나중에 초대 수상이 된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전세계를 향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했다. “유대인 국가가 다른 나라들처럼 독립된 주권국가로 살아가는 것은 천부의 권리다. 이에 우리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의 수립을 선언한다.”
40분 동안 계속된 이스라엘 독립선언식이 끝나자 숨을 죽이며 방송을 듣던 유대인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2000년 이상 나라 잃은 민족으로 설움받고 살아온 유대인들이 독립국가의 탄생을 경험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중동문제’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벤 구리온의 독립 선언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대지를 진동하는 포성이 들려왔다. 이스라엘 독립을 결사 반대해온 주변의 아랍국가들(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다. 신생 이스라엘의 탄생은 이렇게 전쟁으로 시작됐고, 이는 앞으로 계속될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피나는 혈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서구 제국(諸國)들은 큰 딜레마에 봉착했다. 아랍권은 일치단결해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극력 반대했고, 서방세계는 산유국 아랍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나라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미국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승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즉각 인정성명을 내 신생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데 앞장섰다. 미국의 뒤를 이어 다른 나라들도 이스라엘 승인 대열에 동참했고 그 결과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에서 건국의 은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아랍권의 반미 감정은 이때그 씨앗이 심어졌다.
아랍권 패배로 돌아간 중동전쟁
기원전 6세기(BC 587년) 유다 왕국이 바빌론 군대에게 짓밟혀 멸망한 이래, 마카비 혁명으로 잠시 독립을 회복한 일이 있었으나(BC 2∼1세기) 유대인들은 줄곧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왔다. 이스라엘 고토(故土)에서 생존을 계속한 유대인도 적지 않았지만, 대다수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온갖 핍박과 차별의 수모를 당하며 삶을 이어왔다.
1898년 정치적 시온주의(Political Zionism)의 아버지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이 “앞으로 50년 후 이스라엘이 독립할 것이다”는 말을 했을 때, 아무도 그것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1948년 헤르츨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여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이나 주변 아랍국가들에 있어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날은 역사에서 지워버려야 할 날이었다.
서기 630년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한 이래 아랍인들은 1300여 년 동안 실질적인 주인으로 살아왔다. 물론 그 땅엔 유대인들도 살고 있었으나, 그들은 피정복민으로서 소수자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시온주의 운동의 결과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2차대전 후,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1300년 이상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들과 이들과 동조하는 주변 아랍 국가들이 일치단결해서 이스라엘 독립에 반대하고 반기를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솔로몬왕 때 한 아기를 놓고 두 여인이 자기 아이라고 싸웠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이라는 하나의 땅에 주인이 둘이 됐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아랍권은 곧 연대하여 신생 이스라엘에 공격을 가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로서도 이것은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국토는 국가의 구성요소로서 필수적이기에 이스라엘로서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국토를 확보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공격해오는 아랍권에 비해 군비나 병력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열세였다.
그러나 UN의 중재로 1949년 1월 휴전이 됐을 때, 전쟁의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랍측이 군사적으로 월등히 앞섰음에도 승리는 이스라엘측으로 돌아간 것이다.
전쟁이 종결됐을 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0%를 차지하는 전과를 거뒀다. 지금도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과 ‘가자지구(Gaza Strip)’, 이 두 지역을 제외하고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이스라엘이 차지한 것이다.
난제로 떠오른 팔레스타인 난민
하나는 이스라엘의 통치 밑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주변 아랍국가로 피난한 아랍인들이다. 이들을 팔레스타인 난민(Palestinian refugees)이라 부르며, 오늘날 약 38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5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요르단·레바논·시리아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망향의 한을 달래며 난민촌(refugee camps)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난민이 되기보다는 이스라엘 통치 밑에서 그대로 살기로 한 아랍인들이다. 이들을 ‘이스라엘 아랍인(Israeli Arabs)’이라 부른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오늘날 약 120만명에 이르며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한다. 현재 이스라엘 아랍인들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서 이들의 정당도 3개나 된다. 지난 1월28일 이스라엘 총선에서는 아랍계 국회의원이 8명이나 선출됐다.
1956년 이집트가 주동이 되어 시리아, 요르단 세 나라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은 아랍측의 군사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선제공격을 가했다. 제2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유엔은 곧 중재에 나섰고, 치열했던 전투는 9일 만에 종식됐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일방적 승리를 거뒀다.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두자 팔레스타인 과격파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규 전쟁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대(對)이스라엘 투쟁의 방법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무력단체를 구성한 것이다.
1964년 아라파트(Arafat)가 이끄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출범했다. PLO는 테러라는 폭력수단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에 대항하고,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괴멸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진 테러조직이었다. PLO가 저지른 테러사건 중 가장 세계를 경악케 했던 것은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에게 가한 테러였다. 복면을 한 PLO 테러범들이 올림픽 선수촌에 잠입해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미국은 1980년 후반까지 PLO를 테러집단으로 규정, 그들과 일절 대화나 협상을 거부했다.
한편, 1967년 6월 또다시 팔레스타인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큰 전쟁이 일어났다. ‘6일 전쟁’으로 알려진 제3차 중동전쟁이다. 단 6일간의 전투 끝에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해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은 남부전선에서 이집트와 싸워 승리하고,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요르단과 싸워 승리하고 요단강 서안지역과 동 예루살렘(East Jerusalem)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북부전선에서도 시리아와 싸워 승리하고 골란고원(Golan Heights)을 차지했다.
제4차 중동전쟁 후 평화협정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특별히 동 예루살렘의 탈환에 최정예부대를 투입했다. 동 예루살렘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역사적인 예루살렘 지역을 지칭하며, 유대인들의 성지 중 성지인 ‘통곡의 벽’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이스라엘 병사들이 통곡의 벽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얼굴은 땀과 감격의 눈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완승의 꿈을 이뤘으나, 아랍세계와의 사이에 팬 갈등의 골은 끝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1973년 10월6일. 이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지켜오는 속죄일(히브리어, 욤 키풀)이었다. 여느 해와 같이 전국은 완전히 철시되고 라디오와 TV 방송도 중단된 상태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하며 속죄일을 지키고 있었다. 바로 그 날, 지축을 진동시키며 불을 뿜는 대포 소리가 이스라엘 전역을 뒤흔들었다. 시리아와 연합한 이집트의 10만 군대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네 번째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속죄일에 일어난 전쟁이라 해서 보통 ‘욤 키풀 전쟁’이라 부른다.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텔 아비브 박물관에서 벤 구리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
초반 전세는 당연히 이스라엘에 불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이스라엘군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하는 기이한 양상이 벌어졌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갔고, 당시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의 유명한 ‘셔틀 외교’로 휴전이 이뤄지게 됐다. 제4차 중동전쟁도 이렇게 이스라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완승을 거두었고, 아랍측은 완패를 당했다. 아랍측에서는 전쟁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들의 대(對)이스라엘 정책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째는 이집트의 정책변화였다. 이집트는 중동 아랍국가 중 군사강국이고,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을 주도했던 나라다. 그런데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공존의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한 것이다. 미국 카터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 1978년 이스라엘 베긴 수상과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동의했고, 다음해인 1979년 3월, 이집트는 마침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집트는 아랍국가 중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은 나라가 됐고, 그 공로로 사다트 대통령은 베긴 수상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미국, PLO를 협상대상으로 인정
그러나 평화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을 때 주변 아랍국가들은 이를 극렬히 반대했고, 이집트는 아랍동맹(Arab League)에서 축출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사다트 대통령이 이집트 내 강경파에 의해 저격당해 죽음으로써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둘째는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측의 변화다. ‘6일 전쟁’에서 아랍측이 패배한 후 PLO는 본부를 요르단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1970년 요르단 정부가 PLO를 추방, 결국 레바논으로 이동하게 됐다. PLO는 레바논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과 테러행위를 계속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PLO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결단했다. 그것이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다. PLO 본거지를 분쇄하기 위해 레바논 국경을 넘은 이스라엘 군대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레바논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은 PLO는 레바논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로 흩어져 명맥을 유지했다.
1991년 걸프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중동문제 해결을 위해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4개국(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을 스페인 마드리드에 불러모았다. 마드리드 평화회의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국이 PLO를 평화협상의 대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은 PLO를 테러집단으로 단정하고, 이들과 일절 대화나 접촉을 금지했었다. 그러나 마드리드 회의 결과 PLO는 테러조직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에서 협상과 대화의 대상으로 인정받게 됐다.
다른 한편, PLO측이 이러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은 그들의 정책적 변화를 의미했다. 게릴라전이나 테러 같은 폭력적 수단보다는 협상을 통해서 이스라엘과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마드리드 회의로 시작된 일련의 평화회담은 마침내 1993년 워싱턴에서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으로 열매를 맺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PLO의 아라파트가 앞으로 전개될 평화협상의 원칙에 서명한 것이다.
이 원칙선언은 ▲이스라엘과 PLO 양측이 상대방의 존재할 권리(right to exist)를 인정하고 ▲PLO는 테러 같은 폭력적 수단을 포기하며 ▲이스라엘 궤멸을 목적으로 삼는 PLO 강령을 수정하겠다는 것을 포함했다. 또한 ▲향후 5년간 요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사이에 평화공존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1993년 9월 이스라엘 총리 라빈과 PLO의 아라파트 의장이 미국 백악관 뜰에서 이 평화공존의 틀에 서명함으로써 라빈 총리와 외무장관 페레스, 그리고 아라파트는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64년 이래 테러조직의 우두머리로 악명 높았던 아라파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세계는 착잡한 심정이었으나, 평화공존으로 방향을 선회한 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 원칙선언에 명시된 평화의 틀대로 역사의 방향이 진행됐더라면, 오늘날 중동지역은 평화의 땅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향한 항진은 암초에 부딪쳐 좌초되고 말았다. 1995년 11월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 내 극우파 청년이 쏜 총탄에 저격당해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전세계를 경악과 슬픔에 잠기게 했다. 라빈 총리가 암살당한 후 대아랍 강경파가 집권했고, 평화공존을 향한 행보는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셋째 변화는 PLO의 평화공존 노선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새로운 테러조직들이 생겨난 것이다. 하마스, 히스볼라, 이슬람 지하드 등 테러조직은 PLO가 연성으로 정책을 선회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생겨난 무장조직들로서 이스라엘 민간인들에 대해서까지 자살폭탄테러를 서슴지 않는 극단적인 폭력집단이다.
무위로 끝난 캠프 데이비드 회담
2000년 7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들였다. 22년 전 카터 대통령이 그곳에서 이뤄낸 외교의 성공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로 시작된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회담은 장장 2주간 계속됐다. 회담에 참석한 바라크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각기 나름대로 이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바라크 총리는 그보다 1년 전에 있었던 선거에서 이스라엘 국민에게 총리가 되면 1년 안에 팔레스타인과 평화관계를 이뤄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총리직에 오른 후 1년이 지나도록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니 내심 초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라파트 수반에게도 그 회담은 중요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꿈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일이다. 아라파트는 2000년 9월13일을 팔레스타인 국가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로 정해놓고, 그 날 독립을 선언할 것이라 공포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대는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9월13일을 두 달 가량 남겨놓은 시점에서,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아라파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회담은 군인으로서는 유능했으나 정치엔 초년생이었던 바라크 총리와, 36년간 PLO 의장 자리를 지켜온 아라파트 간 대결의 장이었다. 바라크 총리는 회담을 성공시키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노회한 아라파트는 그럴수록 여유를 부리며 바라크가 제시하는 조건에 부정적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조급해진 바라크 총리는 자신의 마지막 카드를 아라파트에게 내밀고 말았다.
바로 예루살렘 분할안이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분할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논의조차 할 수 없는 금기 중 금기였다. 1980년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공식 선언했다. 예루살렘 땅은 한치도 아랍측에 양보할 수 없다는 게 확고부동한 이스라엘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라크 총리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을 위해서라면 예루살렘이라도 분할할 수 있다는 파격적 제안을 한 것이다.
바라크 총리의 정치적 생명을 건 제안에 대해 아라파트는 수락을 거부했다. 왜 정치협상에 능한 아라파트가 그런 파격적인 양보안을 수락하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미지수다. 아마도 그로서는 예루살렘 ‘분할’이 아니라 예루살렘 ‘전체’를 장차 수립될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삼기 원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결국 2주 동안 열린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만일 이 회담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어떠한 합의라도 이뤄졌더라면, 그래서 평화공존을 향한 행보가 재개됐더라면 중동문제는 지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오늘과 같이 혼란의 극으로 치닫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전산’ 방문이 ‘인티파다’ 촉발
‘6일전쟁’당시 ‘성전산’지역을 탈환한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계속 “노”만을 반복했던 아라파트는 귀국하자 열광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환영인파에 파묻혔다. 사실 그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대통령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이익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라파트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위기관리기술 덕분이었다.
반면 바라크 총리는 각료 외에는 맞아주는 사람 없이 쓸쓸히 귀국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야 했다. 이스라엘 내 우파는 바라크 총리를 예루살렘까지 팔레스타인측에 분할해 넘겨주려 한 ‘배신적’ 지도자라고 집중공격했다. 결국 그는 벗어나기 어려운 정치적 궁지에 몰리게 됐고 다음해인 2001년 초 총리선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2000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간의 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외견상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일이었다. 9월28일 오전 7시30분 당시 이스라엘 야당 리쿠드(Likud)당의 당수였던 아리엘 샤론(Ariel Sharon)이 예루살렘 성전산에 오른 것이다. 그는 그곳에 약 15분간 머물렀다. 샤론의 성전산 방문이 이스라엘 정치에 태풍을 몰아오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래 최악의 중동사태를 불러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마치 시한폭탄에 불을 붙인 듯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흥분한 그들은 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총을 쏘며 저지하는 이스라엘 경찰과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아랍인들의 대규모 항거운동(인티파다, Intifada)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점화된 인티파다는 지금까지도 수그러질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치인의 성전산 방문이 왜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에게 성전산이 갖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성전산(聖殿山, Temple Mount)’은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던 장소다. 지금은 물론 성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전세계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곳이요, 성지 중 성지다. 오늘날에도 성전산 위로는 이스라엘 비행기가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하게 여긴다.
양보할 수 없는 ‘성지 중 성지’
한편 이곳은 이슬람교도에게도 3대 성지 중 하나다. 이슬람교도들은 마호메트가 지상의 삶을 끝내고 백마를 타고 승천한 장소가 바로 성전산 지역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밟았던 마지막 발자국의 흔적까지도 이곳 바위에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두 개의 거대한 이슬람교 대사원을 건축했고(서기 600년대 말) 이곳을 ‘하람 에스 샤리프(Haram esh-Sharif)’라 부르고 있다. ‘고귀한 성역’이란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아랍인들이 이곳을 성지로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방금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솔로몬 성전이 서 있던 장소이고,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마호메트가 승천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산’으로, 이슬람교도들은 ‘하람 에스 샤리프’로 부른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양측 모두에게 이 지역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지라는 점이다.
서기 7세기 중엽(630년대),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그 후 줄곧(십자군 시대를 제외하고는) 성전산 지역의 주인이었다. 그러던 중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67년, ‘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성전산 지역 탈환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이스라엘 최정예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성전산 ‘탈환’에 성공했다. 장장 1300년 만에 유대인들이 성전산을 다시 차지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즉시 성전산 지역을 이스라엘 국토에 합병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일방적 선언일 뿐, 지금까지도 성전산 지역은 여전히 아랍인들이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극단적인 과격파 유대인들이 있다. 이들은 성전산을 아랍인들에게 내준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성전산 위에 있는 두 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폭파시키고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겠다는 사람들이다. 이런 극단적 생각을 갖고 있는 유대인이 상당수라는 것은 극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아랍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성전산 지역을 대(對)팔레스타인 강경파로 잘 알려진 샤론이 방문, 그 동안 비교적 잠잠했던 중동사태에 불을 붙인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그의 성전산 방문을 이스라엘측이 언젠가는 성전산을 영구히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하게 드러낸 상징적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동문제 전문가들은 샤론의 성전산 방문이 팔레스타인인들의 항거운동(인티파다)을 촉발시켰다기보다는 인티파다의 ‘구실’을 만들어줬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좌절감과 끓어오르는 분노로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그해 9월13일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선언일’로 정해놓고 가슴 졸이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두 달 전에 있었던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협상은 아무런 결론 없이 실패로 끝났다. 그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측은 독립을 선언할 수 없었다.
9월13일을 그냥 지나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소망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에 몸부림쳤고, 좌절감은 곧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분노로 변했다. 이런 민감한 시점에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 강성 인물인 샤론이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오른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억제돼 있던 분노는 일시에 폭발했고, 곧 이스라엘 항거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그런데 지난 28개월 동안 계속된 인티파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항거운동과는 전혀 다른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그것은 자살폭탄테러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가공할 것은 테러의 공격목표가 군사시설이나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팔레스타인측의 주장에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해도 민간인을 테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떤 대의명분으로도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2000년 9월 이래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을 공격목표로 1만6000건이 넘는 테러를 자행했고, 사망자 731명, 중상자 444명, 기타 부상자 4016명의 희생을 냈다(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강력하게 대응했고, 그 결과 팔레스타인측은 유대인측에 비해 세 배가 넘는 희생자를 냈다).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자살폭탄테러 등 폭력적 행위를 테러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땅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정당한 저항행위, 즉 ‘레지스탕스’라고 주장한다. 2002년 3월말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개최된 22개국 아랍국가연맹회의에서도 팔레스타인측의 행위는 ‘테러’가 아니라 ‘레지스탕스’였다고 지지해주었다.
“先 테러행위 중단, 後 협상”
‘테러’와 ‘레지스탕스’의 구분이 흑백을 가리듯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적 관례는 다음의 네 가지 요건을 갖춘 폭력행위를 ‘테러’로 정의한다. 첫째 미리 계획된 고의적인 폭력행위, 둘째 정치적 동기에서 유발된 폭력행위, 셋째 민간인을 공격목표로 하는 폭력행위, 넷째 국가의 정규군대가 아닌 조직이나 단체에 의해 수행되는 폭력행위다. 이 정의는 국제적으로 널리 수용되고 있고 미국 국무성도 이 기준을 따른다. 이 기준에 비춰볼 때 현재 팔레스타인 과격파들이 벌이고 있는 폭력행위는 분명히 ‘테러행위’에 해당한다.
테러행위를 감행하는 팔레스타인측의 1차적 요구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요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로부터 즉시 철수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 이스라엘측과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즉 ‘선 철수, 후 협상’이다.
반면 2001년 초부터 이스라엘 정부를 이끌고 있고, 지난 1월28일 총선에서 재승리한 샤론 총리의 입장은 초지일관 ‘선 테러행위 중단, 후 협상’이다. 팔레스타인측이 테러행위를 중단하지 않는 한 그들과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테러행위 중단이 협상과 대화의 전제조건이다.
물론 이스라엘 내에도 강경파와 온건파 양측의 견해가 있다. 지난해 11월 노동당 당수로 선임된 아므람 미츠나(Amram Mitzna)의 입장은 팔레스타인측과의 평화공존을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요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로부터 이스라엘측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샤론 총리로 대표되는 강경파의 입장은 이스라엘의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철수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 대부분은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의 ‘군사적 점령상태’가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언젠가는 철수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사실 이스라엘측은 한번도 이들 지역이 이스라엘 국토의 일부라고 공식적으로 주장한 일도 없고, 합병하려고 시도한 바도 없다(이스라엘 군사점령지역 중 이스라엘이 자기 국토로 합병시킨 유일한 지역은 동 예루살렘뿐이다. 동 예루살렘은 성전산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평화공존의 5가지 걸림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를 누리며 공존하기 위해서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첩첩산중이다. 몇 가지 난제들을 살펴보자.
첫째,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향권 문제다. 팔레스타인측이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현재 여러 나라에 흩어져 난민촌에서 살고 있는 38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귀향권(right of return)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구문제 때문이다. 현재 이스라엘 내의 유대인 인구는 약 500만명이다. 한편 요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를 포함해서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땅 안에 살고 있는 아랍인의 수는 약 400만명. 여기에 380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귀향할 경우, 팔레스타인 땅 안의 아랍계 인구는 780만명으로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아랍인의 수가 유대인보다 훨씬 많아진다. 이러한 인구 역전현상만은 막아야 된다는 게 이스라엘의 강경한 입장이다.
둘째, 유대인 정착촌 문제다.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 요소요소에 144개의 유대인 정착촌(Jewish Settlements)을 건설했고, 현재 2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여론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을 강력 반대해왔으나,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꾸준히 감행해왔다. 특히 현 이스라엘 총리인 샤론은 정착촌 건설의 강력한 주창자로서 강경한 태도로 정착촌을 옹호해온 인물이다.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주력한 것은 그들이 군사점령지역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하며 유대인 정착촌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로서는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이 강행해온 유대인 정착촌을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정착촌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셋째, 팔레스타인 국가(Palestinian State) 수립 문제다. 미국을 비롯해서 국제여론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 그 절차와 시기의 문제는 앞으로 이스라엘측과 협의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측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를 동 예루살렘으로 고집하는 한, 이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넷째, 예루살렘 문제다. 특히 동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의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측이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기 때문에 최후의 난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다섯째, 골란고원 문제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 갈릴리 호수는 최대의 수자원이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와 시리아에 속한 골란고원은 인접해 있다.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소유하고 있는 한 이스라엘의 최대 수자원은 언제나 시리아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된다.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은 후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시켰다(1981년). 이후 골란고원 문제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 갈등의 핵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시리아측에 반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골란고원 반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적대관계는 종식되기 어려울 것이다.
팔레스타인 평화가 세계 평화 관건
지난 1월28일 이스라엘에서 총선이 실시됐다. 결과는 강경파 샤론의 압승이었다. 기대를 뛰어넘어 그가 이끄는 리쿠드당은 이스라엘 국회의석 38석을 거뜬히 따내 최대 다수당이 됐다. 한편 아므람 미츠나가 이끄는 노동당은 예상외로 대패했다. 불과 19개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노동당 역사상 최악의 선거결과였다. 이스라엘 국민은 온건파인 미츠나보다 강경파 샤론을 선택한 것이다.
선거 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이스라엘 국민의 60% 이상은 일관되게 온건파 미츠나의 정강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강경파 샤론의 손을 들어줬다. 팔레스타인측의 테러공세가 줄어들지 않는 상황에서 샤론의 강경한 입장을 지지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평론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리’로는 미츠나를 지지했지만, ‘가슴’으로는 샤론에게 표를 던졌다고 평했다.
전술한 대로 샤론의 일관된 입장은 팔레스타인측의 테러가 계속되는 한 절대로 이들과 협상이나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샤론이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선거 전보다 정치적 기반이 단단해진 상황에서, 팽팽한 대치상황에 놓인 중동문제에 어떤 해법을 제시할 것인가에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측이 선거로 힘을 얻은 샤론에게 어떻게 대응할지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와 같이 폭력적 테러 전술을 지속할 것인지, 혹은 이스라엘과 어떤 형태로든 공생의 모드로 전환할 것인지는 모두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팔레스타인 땅의 평화 정착은 중동지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 평화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끝)
박준서
● 1940년 서울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연세대 신학과 졸업
● 미국 예일대 석사·프린스턴신학대학원 박사(신학)
● 1977∼ 연세대 신과대 교수
● 1999∼ 한국기독교학회장
● 저서: ‘구약개론’ ‘성지순례’ ‘십계명 새로보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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