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스리랑카, 네팔, 티벳 개괄인도, 스리랑카, 네팔, 티벳 개괄

Posted at 2012. 4. 4. 00:57 | Posted in 해외여행정보/인도,네팔,파키스탄

<인도>

 

BC 1500~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선사시대에 이란과 인도 북부지역에 살던 민족.

 

이들의 언어인 아리아어에서 남아시아의 인도유럽어가 비롯되었다. '고귀한'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아리아(ārya)에서 유래한 이 말은 19세기까지 '인도유럽'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더 좁게는 인도이란어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인도아리아어족을 가리키는 말로만 쓰인다.

 


19세기에는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셈족'이나 '황인종'·'흑인종'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인류의 진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종인 '아리아 인종'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다.

 

이러한 견해는 고비노 백작과 그의 제자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제시되었다. 이때문에 노르딕, 즉 게르만 인종이 순수한 '아리아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 중반에 많은 인류학자에 의해 거부되었으나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오용되어 유대인·집시 등 '비아리아 인종'을 제거하려는 독일 정부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나갔다. 이 시기에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나왔고 산스크리트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국어로 사용되었다.

 


라지푸트 요새 /라자스탄 주의 자이살메르가 내려다보이는 ...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BC 6세기에 나타났다.

 

북부 인도찬드라 굽타(BC 321경~185)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왕(BC 238 죽음)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2/3가량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그후 수많은 소왕국들로 분열되었다가
굽타 왕조(AD 320~480)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은 AD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

 

14세기초에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델리 술탄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인
바만 왕조가 성립(1347)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비자야나가르가 1336~1556년에 걸쳐 남부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포르투갈 요새 /디우의 북쪽 해안에 있는 ...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7~98)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포르투갈인·영국인·프랑스인·네덜란드인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초에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 대왕(1556~1605)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동인도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동인도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 다음 해인 1858년에 영국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국민회의(1885)와 전인도이슬람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협조적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의회 민주주의를 잘 이끌고 있다.

 

하지만 파키스탄과 3번의 짧은 전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전쟁에서 1971년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1980, 1990년대 들어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인도사).

 


Macropaedia| 任錫會 옮김

 

인도사 (역사) 

 

현재의 인도공화국과 1947년에 각각 분리·독립한 파키스탄방글라데시 공화국도 포함하는 인도아대륙(인도반도)의 역사.

 

남쪽으로는 드넓은 대양이 감싸고 있고, 북쪽으로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북극의 찬바람과 중앙 아시아의 건조한 기류를 차단시켜준다. 이와 같은 지형적 영향으로 인도아대륙은 최북단에 해당하는 잠무와 카슈미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열대성 기후대를 이룬다.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곳은 북서쪽과 북동쪽뿐인데,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대부분 이 지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쪽으로는 구릉들과 산들로 이루어진 인도-이란 국경이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미얀마 국경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인도아대륙은 대체로 북부지역의 인더스·갠지스 강 유역과 남부지역의 인도반도로 구분된다.

 

인더스
갠지스 강 유역은 광막한 충적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위대한 두 도시문화, 즉 BC 3000년경의 인더스 강 유역 문명과 BC 1000년경의 갠지스 강 유역 문명을 낳은 중심지였다.

 

남쪽으로 이 지역을 반도와 분리시키는 구릉들과 산림지대에는 오늘날까지도 원주민이 살고 있다. 이 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르마다 강이 흐른다. 이 강은 오랫동안 북인도와 남인도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북부인도는 고유문화와 인종을 가진 여러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 고지대는 강우량이 낮은 지역으로, 주로 밀과 보리를 생산하는 곳인데,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란계의 이웃 종족들과 매우 유사하다. 인접해 있는 인도 평원도 강우량이 극히 적은 지역이지만, 해마다 범람하던 인더스 강과 근래에 들어서는 운하에 의한 관개수로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상응하여 발루치스탄 지역보다 인구밀도도 높다.

 

인더스 강 유역은 북쪽의
펀자브 지역과 중앙의 신드 평원, 남쪽의 인더스 삼각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색인:인더스 계곡). 이 삼각지대의 동쪽은 타르 사막 지역이며, 이곳은 다시 반도의 최북단인 아라발리 구릉지대와 접해 있다.

 

이 지역들을 벗어나면
라자스탄 구릉지대와 말와 고원이 펼쳐진다.

 

그 남쪽은
카티아와르 반도인데, 이 지역은 지형적·문화적으로 라자스탄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 지역들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보다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그러나 지형적인 이유들 때문에 다소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북부인도의 펀자브라자스탄 동쪽은 대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여러 강줄기들과 북쪽의 히말라야 산 기슭을 따라 펼쳐져 있다.

 

그 남부지대는 언덕과 수많은 단층애로 길이 끊긴 산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디아 산맥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반드레르·레와·카이무르 평원 등이 속해 있다. 중앙 인도의 구릉지대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갠지스 강 본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지역은 높은 인구밀도와 적당한 강우량 및 고도의 농업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곳이다
(→ 색인:인도 갠지스 평원).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BC 1000년경부터
이 이 지역의 주식으로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록 서쪽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인도는 이 북동부 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 들어 밝혀지고 있다.

 

<인도>

 

BC 1500~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선사시대에 이란과 인도 북부지역에 살던 민족.

 

이들의 언어인 아리아어에서 남아시아의 인도유럽어가 비롯되었다. '고귀한'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아리아(ārya)에서 유래한 이 말은 19세기까지 '인도유럽'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더 좁게는 인도이란어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인도아리아어족을 가리키는 말로만 쓰인다.

 


19세기에는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셈족'이나 '황인종'·'흑인종'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인류의 진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종인 '아리아 인종'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다.

 

이러한 견해는 고비노 백작과 그의 제자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제시되었다. 이때문에 노르딕, 즉 게르만 인종이 순수한 '아리아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 중반에 많은 인류학자에 의해 거부되었으나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오용되어 유대인·집시 등 '비아리아 인종'을 제거하려는 독일 정부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나갔다. 이 시기에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나왔고 산스크리트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국어로 사용되었다.

 


라지푸트 요새 /라자스탄 주의 자이살메르가 내려다보이는 ...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BC 6세기에 나타났다.

 

북부 인도찬드라 굽타(BC 321경~185)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왕(BC 238 죽음)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2/3가량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그후 수많은 소왕국들로 분열되었다가
굽타 왕조(AD 320~480)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은 AD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

 

14세기초에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델리 술탄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인
바만 왕조가 성립(1347)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비자야나가르가 1336~1556년에 걸쳐 남부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포르투갈 요새 /디우의 북쪽 해안에 있는 ...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7~98)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포르투갈인·영국인·프랑스인·네덜란드인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초에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 대왕(1556~1605)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동인도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동인도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 다음 해인 1858년에 영국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국민회의(1885)와 전인도이슬람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협조적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의회 민주주의를 잘 이끌고 있다.

 

하지만 파키스탄과 3번의 짧은 전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전쟁에서 1971년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1980, 1990년대 들어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인도사).

 


Macropaedia| 任錫會 옮김

 

인도사 (역사) 

 

현재의 인도공화국과 1947년에 각각 분리·독립한 파키스탄방글라데시 공화국도 포함하는 인도아대륙(인도반도)의 역사.

 

남쪽으로는 드넓은 대양이 감싸고 있고, 북쪽으로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북극의 찬바람과 중앙 아시아의 건조한 기류를 차단시켜준다. 이와 같은 지형적 영향으로 인도아대륙은 최북단에 해당하는 잠무와 카슈미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열대성 기후대를 이룬다.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곳은 북서쪽과 북동쪽뿐인데,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대부분 이 지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쪽으로는 구릉들과 산들로 이루어진 인도-이란 국경이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미얀마 국경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인도아대륙은 대체로 북부지역의 인더스·갠지스 강 유역과 남부지역의 인도반도로 구분된다.

 

인더스
갠지스 강 유역은 광막한 충적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위대한 두 도시문화, 즉 BC 3000년경의 인더스 강 유역 문명과 BC 1000년경의 갠지스 강 유역 문명을 낳은 중심지였다.

 

남쪽으로 이 지역을 반도와 분리시키는 구릉들과 산림지대에는 오늘날까지도 원주민이 살고 있다. 이 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르마다 강이 흐른다. 이 강은 오랫동안 북인도와 남인도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북부인도는 고유문화와 인종을 가진 여러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 고지대는 강우량이 낮은 지역으로, 주로 밀과 보리를 생산하는 곳인데,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란계의 이웃 종족들과 매우 유사하다. 인접해 있는 인도 평원도 강우량이 극히 적은 지역이지만, 해마다 범람하던 인더스 강과 근래에 들어서는 운하에 의한 관개수로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상응하여 발루치스탄 지역보다 인구밀도도 높다.

 

인더스 강 유역은 북쪽의
펀자브 지역과 중앙의 신드 평원, 남쪽의 인더스 삼각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색인:인더스 계곡). 이 삼각지대의 동쪽은 타르 사막 지역이며, 이곳은 다시 반도의 최북단인 아라발리 구릉지대와 접해 있다.

 

이 지역들을 벗어나면
라자스탄 구릉지대와 말와 고원이 펼쳐진다.

 

그 남쪽은
카티아와르 반도인데, 이 지역은 지형적·문화적으로 라자스탄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 지역들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보다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그러나 지형적인 이유들 때문에 다소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북부인도의 펀자브라자스탄 동쪽은 대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여러 강줄기들과 북쪽의 히말라야 산 기슭을 따라 펼쳐져 있다.

 

그 남부지대는 언덕과 수많은 단층애로 길이 끊긴 산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디아 산맥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반드레르·레와·카이무르 평원 등이 속해 있다. 중앙 인도의 구릉지대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갠지스 강 본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지역은 높은 인구밀도와 적당한 강우량 및 고도의 농업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곳이다
(→ 색인:인도 갠지스 평원).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BC 1000년경부터
이 이 지역의 주식으로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록 서쪽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인도는 이 북동부 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 들어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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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선사시대

 

인도아대륙에서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멀리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이 시기의 수렵인들은 오랫동안 인도대륙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정착농경사회와도 밀접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은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에서 동부의 벵골에 이르는 지역 및 북부의 서북 국경지대에서 남부의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아직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인도문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차원의 지식을 제공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공동체의 삶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양·물소 등의 가축을 길렀던 흔적도 보인다. 당시의 수렵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는 활과 화살이 대부분인데, 날카로운 돌조각을 이용한 작살이나 도끼 등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냥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단계의 어로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인도아대륙에서는 정착농경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들로서는 케랄라 동쪽 산기슭의 마라이유르, 구자라트의 랑나지, 라자스탄의 바고르, 마디아프라데시 인근의 모샹가바드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인도 /인더스 문명의 주요도시들

 

수렵과 채집생활의 신석기 단계를 거친 인도아대륙은 점차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도시문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도시문화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인더스 문명은 BC 4000년경 발루치스탄 고원지대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농경문화가 BC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의 범람지로 확대·발전되면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문화이다. 인더스 강 문화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 경과 그의 동료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시행된 유적발굴조사 결과 이 문명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발굴자들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어떤 문명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했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런 가정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두 문명은 서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받은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문명 자체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고유한 것이었음이 고고학적 조사결과 입증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연한 도시계획에 있다(→ 색인:인도건축). 건물들 사이는 일정한 간격을 둔 바둑판 모양의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골목길 상하 좌우로는 벽돌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사방으로 연결되는 수로를 판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방향으로는 성채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높게 건설되었고, 그 아래로는 시가지가 격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칼리방가 지역을 예로 들면 거리의 너비와 모양이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주요도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작은 골목길들은 서로 분기점을 이루면서 각각 크고 작은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시의 기능과 효율성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삼 이들의 도시계획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일반적인 건축재료는 벽돌이었다. 구운 벽돌과 진흙 벽돌을 건축물의 사용목적에 따라 각각 구별해서 썼다. 예를 들어 제방이나 대중집회소에는 진흙벽돌을 사용했고, 목욕탕·성벽·수로 등에는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 이때 벽돌을 쌓는 방법은 벽돌의 가로면과 세로면을 1번씩 겹치게 하는 이른바 영국식 쌓기를 주로 이용했다. 이 벽돌 외에도 필요에 따라 목재를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당시의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모헨조다로하라파이다. 특히 모헨조다로에서는 대중목욕탕이 발견되어 이 문명의 질적 수준과 함께 당시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 목욕탕은 성채의 북쪽 중간지점에서 잘 보존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약 83㎡ 크기의 벽돌 구조물이었다. 그 내부는 높낮이가 다른 2단의 바닥으로 설계되어 있어, 1단 높은 곳은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장으로 추정된다. 한편 목욕탕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일단의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벽돌로 만든 약 1.5m 높이의 연단들이 보인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지배자였던 정치권력자나 제사자들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이곳은 경건한 종교의식을 행하기 직전에 공동으로 몸을 닦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색인:정화의식).

 


모헨조다로의 북서쪽 12km 지점에 위치한 하라파 지역 역시 모헨조다로와 거의 대동소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라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신상(母神像)·동물상·장의(葬儀)의 풍습이 약간씩 다를 뿐이다. 특히 하라파의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례와 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정한 구역에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여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 다음, 유골만을 다시 추려 항아리 같은 용기에 담아 땅속에 매장했다(→ 색인:묘지). 이른바 조장(鳥葬)의 풍습이다. 여기서 어렴풋이나마 생명의 환생에 대한 하라파인들의 기대심리를 엿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시신을 다른 짐승들의 먹이로 베푸는 보시를 통해 영계(靈界)로의 여행을 돕는 음조(陰助)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인들의 종교 성향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꼽고 있는 윤회설의 원시적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로는 칼리방가·로탈 등이 있다.

 


인더스 문명은 대개 BC 1750년 무렵을 전후하여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된 것은 최근 과학의 발달로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은 BC 2300경~1750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갑작스러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홍수에 의한 자연재해설, 인구폭발에 따른 식량부족설, 외부의 공격에 의한 파괴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가정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멸망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 인더스 문명이 그후의 인도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고대 도시국가의 성립
인도 /인도(BC 500경)(왼쪽)와 번영기의 아소카 ...

 

펀자브 지역에서 갠지스 강 중류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BC 7세기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가진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국가형태는 정치학적으로 볼 때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명목상 부족을 대표하는 왕이 있는 나라도 있었으나, 실권은 부족장회의에 있었으며, 왕은 거의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이때 번성한 나라들은 주로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특히 코살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마가다국은 5만여 부락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장 번성했던 나라로 추측된다. 또한 중부인도에 위치해 있던 비데하도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자나카 왕의 통치기에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한편 카시 왕국은 BC 7세기까지 북부인도의 강자로 군림했으나, 그후 코살라국에 합병되었다. 따라서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BC 7세기를 전후한 인도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정복전쟁을 야기시켰다. 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은 BC 4세기경까지 이어진다. 이런 정복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마가다 왕국의 왕 빔비사라(BC 582~554 재위)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족장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내치의 공고화와 주변 소왕국들의 합병을 병행하면서 대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이즈음 훗날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된 고타마 싯달타에 의해 불교가 일어난다.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샤트루(BC 554~527 재위)는 부왕의 뒤를 이어 계속되는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카시·코살라·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아대륙의 최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전성기의 마가다국은 서쪽으로는 야무나 강에서, 동남쪽으로는 칼링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BC 327~326) 때에는 난다 왕조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입은 인도의 정치·종교·문화·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선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동서문화와 사상이 서로 교류·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간다라 예술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조각 양식과 〈밀린다팡하 Milinda-pañha〉 같은 불전이 당시의 대표적 교류 흔적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이 인도 국민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외부의 침입에 무력했던 인도인들이 이를 계기로 새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정신의 고양에 힘입어 인도를 통일하게 된 왕이 바로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 굽타(BC 327~297경 재위)이다. 우선 그는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서북인도를 평정했다. 계속하여 그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그리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늘날의 카르나타가 남부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전지역을 통일한 셈이다. 이 통일은 인도 최초의 강대국으로서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온 마가다의 경제적 기반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사이슈나가 왕조 이래의 마가다국의 팽창정책이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찬드라굽타의 인도통일은 인도인의 손에 의한 최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마우리아 왕조는 이 찬드라굽타로부터 시작된다.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제3대 아소카왕(BC 273~232 재위) 때 번영의 절정기를 맞는다. 그는 데칸 동부의 칼링가를 정복하는 등 남인도의 키스트나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또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까지, 북쪽으로는 카슈미르 및 네팔까지도 자기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결과적으로 인도반도의 남단부인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인도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광대한 영역은 중앙의 직할지를 비롯해 지방 총독이 관할하는 4구역으로 분할·통치되었다. 각각의 행정부처를 담당하는 다수의 관리가 임명·배치되었으며, 지방관리를 감독·통제하는 순회감사관 제도도 시행되었다. 그 최정점에 있는 의 권력은 실로 엄청났다. 이 아소카 왕대에 비로소 제국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즉 완비된 행정조직과 잘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효과적으로 관리·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소카 왕은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살륙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무력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살생금지·비폭력이라는 불교정신에 기초하여 국가를 자비로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비문 또는 석주(石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불교에서는 그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번성하던 마우리아 제국도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분열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여러 왕자들이 각자의 영역을 분할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화폐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으로도 통일제국의 기능을 원활하게 발휘하지 못했던 점 등을 몰락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유능하고 강력한 군주였던 아소카 왕의 재임시에는 그런 대로 잠재되어 있었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가 제국의 몰락에까지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우리아 왕조의 분열과 쇠퇴로 인도대륙은 다시 수많은 군소왕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인도 /굽타 제국(4세기말)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뒤에도, 통일제국을 꿈꾸는 군소 왕국들의 부침(浮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마우리아와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북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320~540)를 가리켜 불완전하나마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의 기본 골격인 중앙집권체제가 비록 완전하지 못했으나, 그 세력권이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에서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굽타 왕조는 인도아대륙의 실질적 강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굽타 왕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마가다 지방의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세력가 집안이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면서 서서히 왕조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왕조는 제3대 왕인 찬드라 굽타 1세의 등극을 계기로 비로소 인도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한낱 지방 공국에 불과했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그는 바이살리의 명문 귀족 리차비가(家)의 공주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정통적 왕가인 리차비 왕가를 혼인동맹의 상대로 삼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미미한 가문이었던 굽타 왕조가 그 계급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찬드라굽타 1세의 등극시기가 320년경이기 때문에 굽타 왕조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가다와 우타르프라데시의 동부지역을 지배했다.

 

찬드라굽타 1세는 330년에 왕권을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에게 넘겨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알하바드 지역에 해당하는 프라야가에 세워졌던 석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무드라 굽타는 델리 주변과 우타르프라데시 서쪽에 있던 4개의 소왕국을 정복했으며, 동인도와 남인도의 군소 왕국들로부터도 충성을 맹세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영역이 현재의 첸나이 지역인 칸치푸람의 동해안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갠지스 강 서쪽 유역인 아리아바르타 지역의 8명의 왕도 무력으로 평정했다. 결국 그는 북인도의 전역을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합병하지 못한 지역들로부터는 조공을 받아냄으로써 인도아대륙의 실질적인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명실상부하게 인도 전역에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쿠샨 왕조를 비롯한 일부 도서지방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찬드라 굽타 2세는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1세의 이름을 딴 군주로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영명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375~415년의 약 40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찬드라굽타 2세의 주된 적대세력은 샤카족이었다. 이들간의 세력다툼은 388년 이후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409년을 고비로 결국 샤카족은 굽타 왕조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서북인도가 완전히 굽타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서북 지방의 항구도시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와 활발한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이후 굽타 왕조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과도 문화적 교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과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한편 찬드라굽타 2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이 405~411년에 인도를 여행하고 남긴 〈불국기 佛國記〉에 의하면 당시의 굽타 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문화수준을 간직하고 있었던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한 예로 찬드라굽타 2세는 산스크리트 극작가인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둘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고 아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비크라마디티아(Vikramāditya:'용맹의 태양')라는 칭호로 불리던 그의 또다른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번영을 누리던 굽타 왕조도 제6대 왕인 쿠마라 굽타(415~454) 때부터, 서북 변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헤프탈족 등의 잦은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쿠마라굽타는 이들 이민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그의 뒤를 이은 역대의 왕들은 더이상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왕국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혼란을 틈타 지역 영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위기도 가중되어 마침내 굽타 왕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인도아대륙은 또 다시 대규모의 민족적 이동과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면서 여러 군소왕국들이 난립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 때 일어난 나라들이 마우카리·푸시아부티·마이트라카 등이다. 이들간의 각축장에서 푸시아부티가(家) 하르샤 왕이 일정 기간 인도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 인도에서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그후 300여 년 동안 이 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주변 소왕국들의 압박으로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다.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문화의 부흥기로 불릴만큼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산스크리트로 씌어진 시와 산문이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하게 저술되었다. 이때 활약했던 칼리다사 등은 오늘날에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당대의 최고 극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조각과 건축물 등의 조형물에서도 최고도의 수준에 달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불행히도 당시의 건축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불교의 승원(僧院 vihara)과 예배소(chaitya) 등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 이유는 8세기에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의 철저한 파괴행위 때문이다. 불교와 힌두교도 이 시기에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힌두교는 그 세력을 점차 인도 전역으로 확대시켜 나가지만, 불교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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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인도대륙은 투르크와 아랍계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인도를 침입하여 유린한 대표적 세력이 가즈나마흐무드와 그의 사후 혼란기를 틈타 가즈나를 타도, 지배하게 된 구르 왕조무하마드 등이다. 이들은 인도를 공격하여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탈취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기보다는 인도대륙 전체를 그들의 지배하에 놓으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의 한 방편으로 투르크와 아랍계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델리에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인도인들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델리는 갠지스 강 유역과 중부·서부 인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세력들은 번갈아가면서 델리에 왕국을 세우고 술탄(sultan:이슬람의 왕)임을 자처했는데, 이들 왕조를 델리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이 왕조는 13세기부터 16세기 무굴제국이 들어서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를 주도했다.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는 이슬람교도 지배자로서는 최초로 델리에 웅대한 궁전과 모스크(이슬람 사원) 및 거대한 탑(minar)을 세웠다. 그는 북인도를 더이상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확장으로 보지 않고 델리를 수도로 하여 인도에 본격적인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이 왕조는 그 후계자들이 쿠트브 웃 딘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궁정 노예 출신이거나 그 직계 자손들이므로 노예왕조(1206~90)라고도 불린다. 그의 아들 일투트미시는 술탄의 위치를 더욱 강화하고 불만세력이던 투르크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대외적으로는 1220년에 인더스 강 유역의 북부 변경지방을 병합하고, 그 지역의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았다. 나아가 그는 1225년에는 벵골을, 1228년에는 신드 지방을 각각 점령했으며, 1229년에는 마침내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정식으로 술탄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29년부터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241년 서부 펀자브 지방을 잃게 되자 그 위세가 꺾였다.

 


노예왕조에 이어 1290년경부터 인도역사에 등장하는 또다른 투르크계 세력집단이 할지 왕조이다. 이 왕조는 알라 웃 딘 치세에 이르러 세력팽창의 절정기를 맞았다. 그는 동인도와 데칸을 성공적으로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1292년에는 야다바가 지배하고 있던 데바기리까지 공략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남인도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1306년 국내문제로 몽골 세력이 북인도에서 물러나자 구자라트와 말와를 수중에 넣었다. 나아가 그는 1310년 마침내 남인도를 원정하여 여러 지역을 성공리에 공략했다. 이제 알라 웃 딘의 영향력은 지배영역에 있어서나 그 세력에 있어서 어느 술탄국 지배자들보다도 강력했다. 그러나 알라 웃 딘의 야망은 북인도의 반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북인도의 구자라트·치투르·데바기리 등이 술탄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는데, 그도 1316년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알라 웃 딘의 사후 몇 년 동안은 계속 왕이 바뀌어 할지 왕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이다. 그는 1320년 술탄의 자리에 올라 투글루크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도 역대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제국을 꿈꾸었으나, 1398년 중앙 아시아의 몽골군이 티무르의 지휘하에 인도를 다시 침입하기 시작하자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인도에서는 티무르의 위임을 받은 사이이드 왕조와 그 뒤를 이은 로디 왕조 등이 명멸을 거듭하게 되고,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이 술탄국의 세력 약화를 틈타 난립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바마니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한편 남인도에서는 그들을 정복하려는 술탄국의 원정을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세력기반을 갖춘 왕조들이 나타났다. 우선 13세기말 후부터 200여 년 동안 북부 데칸을 지배한 바마니(1347~1527) 왕조가 있다. 또한 이 바마니 왕조보다 10여 년 먼저 한때 호이살라가 지배했던 남부데칸의 인도 남부에서는 비자야나가르(1336~1646) 왕국이 독립했다. 비자야나가르는 힌두 왕국으로, 1565년 1월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할 때까지 남인도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바마니와 비자야나가르의 경계선은 크리슈나 강이었다.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 한 데칸과 남인도의 상호 정복전쟁은 14세기에 재개되었다. 이 영토쟁탈전은 비옥하고 광물자원이 풍부한 라이추르도아브 지역을 서로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거기에다 골콘다의 다이아몬드 광산도 서로 탐내는 지역이었다. 14~16세기초에 남인도 역사는 실로 이러한 투쟁과 여러 군소왕국들의 정치적 변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볼 때 비자야나가르와 바마니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358년부터 시작된 라이추르도아브 쟁탈전은 그후 양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정복함으로써 남부 변경지역을 평정했으나, 동쪽의 해안국들과 오리사·와랑갈 등에 대한 지배력은 전보다 약화되었다. 나아가 비자야나가르가 고아 지방을 정복한 것은 무역을 통한 이익증대를 떠나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동부 해안지역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 지역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급변하는 남인도의 정세와 바마니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이었다.

 


반면 바마니 왕국은 15세기 후반부터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국내외적 정치상황에 대처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총리 마흐무드 가반이다. 그는 우선 구자라트의 도움을 받아 북부 변경지대에서 말와 세력을 축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가반은 비자야나가르로부터 고아를 재탈환함으로써 무역활동을 통한 세입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반이 반대파의 암살로 제거되면서, 왕국의 힘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마니의 국력은 비자야나가르의 잦은 침입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1538년 바마니 왕국은 마침내 비자푸르·골콘다·아메드나가르·비다르·베라르 등의 5개 나라로 분열되었다. 가반의 죽음을 계기로 바마니 왕국이 쇠잔해져 갈 즈음 비자야나가르는 상대적으로 남인도에서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크리슈나 데바 라야(1509~30)의 재위시에는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이 비자야나가르도 1565년 탈리코타 전투에서 북부 데칸의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들은 끝내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남인도를 침식해 들어온 이슬람 왕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슬람교도 세력이 제국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무굴 제국이다. 이 기간 동안 인도아대륙에서는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가 서로 융합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관련되는 여러 종교의식이 서로 혼합된 것은 그 한 예이다.

 


 

무굴 제국의 성립과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페르시아어: گورکانی, Gurakâni; 우르두어: مغلیہ سلطنت, Muġalīah Sulṭanat, 힌디어: मुग़ल सलतनत)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왕조이다. 무굴은 몽골인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이다.

 

 

무굴 제국은 티무르 왕조에 속한 바부르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바부르는 차선책으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한 델리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강력한 저항 세력인 아프가니스탄계를 물리치고 영토 확장을 꾀하지만 오히려 그들에 쫓겨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갔다. 그 사이 델리는 후마윤을 물리친 쉐르 샤수르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5년 만을 유지한 채 이란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했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 데칸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아 왕조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루었다. 악바르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분야에서도 무굴 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고자 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융화책을 취했다. 종교적 융화책은 자항기르샤 자한까지 이어지지만 6대 아우랑제브가 다시 인두세를 부활시키는 등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무굴 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이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1857년 무굴제국은 멸망했다.

 

무굴 제국 시기에 형성된 문화는 인도 역사에서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건축, 문학, 음악 등은 힌두 문화와 터키-페르시아계 문화의 융합으로 오늘날 인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도 /무굴 제국의 발전

 

무굴 제국의 기원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그의 후예 바부르(1483~1530)가 훗날 무굴 제국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티무르가 그때부터 이미 인도아대륙을 지배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사이이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 인도아대륙에 그의 영향력을 심어 놓았을 따름이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여러 해 동안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1526) 왕조이다.

 


무굴 혹은 투르크계 몽골 족장인 바부르가 인도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17년 무렵이다. 그러나 바부르는 어릴 때부터 한때 그의 선조들의 땅이었던 북부인도를 회복하려는 집념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야망은 사마르칸트 지역을 되찾으려는 노력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1491, 1503년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패함으로써 그의 꿈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영토회복에 자신을 갖게 된 것은 1504년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산을 가로지르는 이들 두 지역과 바다흐샨을 연결하는 지역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확보를 그 옛날 티무르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한 것에 비유할 만큼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한편 바부르는 1526년 4월 로디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이브라힘과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에서 접전을 벌여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이브라힘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들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몰아냈다(→ 색인:파니파트 전투).

 

바부르는 이 승리를 발판으로 델리에서
아그라로 곧바로 진격, 스스로 인도의 파드샤(역대 무굴 왕들의 칭호)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와 무더위에 지친 병사들은 그들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이때가 바부르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호소력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무굴에의 충성을 간절히 설득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와르라나 상가라지푸트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카누아 전쟁). 이때도 그는 군사력에 있어서의 열세를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고, 라지푸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종족분열과 무굴 기병대의 신속한 전술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바부르는 파트나 근교의 고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군을 패퇴시키고 비하르 지방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또한 벵골의 이슬람 술탄으로부터도 충성을 확인받았다. 이제 그는 서쪽의 야무나 강으로부터 바다흐샨과 카불을 거쳐 동쪽은 벵골, 남쪽은 나르마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대제국 무굴의 초석을 닦은 동시에 그 시조가 되었다.

 


무굴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부르였다면 이 왕조를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악바르(1542~1605)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군사 책략가였다. 악바르는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인간적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신속한 기동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지도력에 힘입어 무굴 제국은 1605년 그가 죽을 때까지 북인도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데칸과 벵골 만 및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현명하게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기보다는 결혼정책이나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힌두의 여러 세력들을 무굴 제국의 실질적 동반자로 흡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황제이자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실질적 융합에도 공헌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무굴제국의 쇠퇴
루피 은화 /인도 무굴 제국 쇠퇴기의 ...

 

악바르 대제가 주변 세력들을 적절히 제어하고 제국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국제정치 역학상 일종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페르시아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유목민의 침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었으므로 무굴이 남인도를 제압하는데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굴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페르시아가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와 접촉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요소를 상당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악바르의 사후, 무굴 제국은 자한기르(1605~27)·샤자한(1628~58)·아우랑제브(1658~1707) 등의 치세를 거치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졌고, 대내적으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이 재연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강인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마라타인들은 매우 지적이고 배타적인 소수의 브라만과 다수의 농노 계층인 수드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영웅 시바지(1627~80)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무굴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세력을 고츠 산맥을 따라 서서히 남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더욱 세력을 키운 마라타족은 1738년 드디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델리 근교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말와 지방을 점령했다. 이로써 마라타 세력은 인도대륙의 한 부족국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인도 대륙을 넘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듯 강성해진 마라타도 1761년 7월 파니파트 대평원에서 마주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함으로써 더이상의 세력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 색인:파니파트 전투). 이후 북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마라타 및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무굴 제국 등이 일종의 힘의 공백기를 맞으면서 혼란과 분열을 거듭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인도대륙을 넘보기 시작한 세력이 유럽 열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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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제국의 인도 진출(1498~1760경)

 

유럽은 인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이 필요로 하는 향료와 직물 및 그외의 진기한 동양상품들이 인도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색인:국제무역). 즉 상업적 이익 때문에 인도는 유럽의 주요 관심대상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향료는 특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향료는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는 작용이 있어, 육류를 즐기는 유럽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와 유럽 간의 무역은 중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2가지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몽골과 투르크의 침입으로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고 있던 육로가 차단되었고, 나아가 이집트를 통과하는 해로까지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당시의 국제적 긴장관계는 이슬람 세력의 타도를 위한 십자군의 원정과 향료를 독점하려는 상업적 열망을 더욱 부채질했고, 마침내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색인:탐험의 역사). 포르투갈인들은 월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곧 아랍 상인들을 제압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후 포르투갈의 천재적 영웅 아포노 알부케르케는 비자푸르의 술탄으로부터 인도의 서안지방인 고아를 탈취하여(1510) 이곳을 동방 포르투갈령의 수도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인도대륙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유럽 세력은 포르투갈인 셈이다.

 

하지만 얼마 뒤 포르투갈은 1세기 동안이나 대립관계에 있던
스페인에게 점령당함으로써(1580)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이어 인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이 차례로 인도에 들어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무역독점 경쟁에 나섰다.

 

특히 세계무역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각축전은 치열했다. 그러나
7년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어 카르나티크 전쟁(1744~48, 1750~54, 1758~63) 및 플라시 전쟁(1757)에서도 프랑스가 영국군에게 대패함으로써 제국간의 식민지쟁탈전에서 약자의 위치로 전락했다.

 


식민지 지배의 확대

 

카르나티크와 벵골의 지배권 확보에 성공한 영국은 이를 발판으로 점차 인도아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각 지역 세력집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남부인도의
마이소르는 인도의 장래에 미칠 영국의 위협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감지하고,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꾀하는 한편, 국내외의 여러 나라와 연락을 취해 우방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내정개혁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의 어수선한 인도 정치상황을 고려해볼 때 극히 이례적인 참신한 개혁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이소르의 노력도 주변 국가들의 외면과 영국군의 침입(1799)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은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와의 동맹관계로 인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마이소르를 간단하게 격파해버렸던 것이다(→ 색인:마이소르 전쟁). 이때 그들의 영웅 티푸(1782~99 재위)도 세링가파탐 전투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전사했다. 전쟁 후 마이소르의 옛 영토는 대부분 영국과 하이데라바드 및 마라타에 분할 병합되었다.

 

이 보다 앞서 1798년에는 마라타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하이데라바드도 영국과 군사보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이 나라 또한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한편 북인도에서는 마라타 동맹과 시크 세력이 영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의 위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오우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 비대해진 마라타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의 이런 정책이 가시화된 것이 이른바 로힐라 전쟁(1774)이다. 1774년 영국군의 원조하에 오우드군은 로힐칸드를 무력 침공하여 이를 병합했다. 이를 계기로 오우드는 마라타와 영국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영국의 세력하에 놓였다.

 

영국이 오우드를 강화함과 동시에 이를 속국화하려 하고 있을 때, 마라타 동맹은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1772년 이후의 페슈와(Peshwa:총리) 계승문제를 둘러싼 내분은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비화되었고,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등 외부세력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른바 제1차 마라타 전쟁(1775~82)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그 성격상 유럽 열강과 토착세력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시작되고 있던 마라타 동맹의 내분에 외국세력이 가세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호시탐탐 인도 국내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찾고 있던 영국측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영국은 전략 요충지 살세트 섬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라타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후계 문제를 둘러싼 각 세력집단간의 갈등으로 또다시 영국의 개입을 불러들였고(제2차 마라타 전쟁:1802~05), 마침내 1818년 마지막 남은 홀카르가도 영국과의 군사보호조약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의 카슈미르·펀자브·신드 등도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모두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신드 병합(1843. 8)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독립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던 시크 왕국도 란지트 싱의 죽음을 계기로 야기된 후계자 다툼의 와중에서 영국의 재물이 되었다. 1·2차 시크 전쟁(1845~46, 1848~49)에서 내부 분열 끝에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도의 거의 전지역이 영국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영국은 거대한 인도대륙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폭동과 반란(1857~59)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비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도반란). 우선 종래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왕가(王家)나 지방 세력가들의 불만이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식 합리주의의 도입은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생활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반영(反英) 분위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폭동이나 반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185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커다란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드디어 불을 당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평소 민족적 자존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대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영국인과 충돌이 잦았었다.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델리에서는 성 안의 세포이와 시민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순식간에 반란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명목뿐이던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안팎에 선언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반란 동참을 호소했다. 이렇게 하여 델리에서 독립의 횃불이 솟아오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란은 인도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반란은 단순한 세포이의 폭동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농민과 일반 시민 등 전사회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우드의
러크나우칸푸르가 그 중심지였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반란은 북부·중부 인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비화되어, 영국의 인도 지배는 바야흐로 붕괴에 직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란군측에도 많은 약점이 있었다. 우선 반란군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고, 효과적인 전략이나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단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모여든 감정적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만한 지도력이나 서로간의 유대감도 희박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들을 진압할 구체적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곧 전투의 주도권을 영국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9월에 들어 델리를 다시 빼앗겼다. 이때 자행된 영국군의 파괴와 학살 행위는 그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델리에 이어 영국군은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얼마 동안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네팔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반면 반란군측은 차츰 내부 분열에 휩싸여 내적 통일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1858년 3월 캠벨이 지휘하는 7만명의 영국·네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격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러크나우마저 함락되었다.

 


이 반란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초래된 많은 문제점들이 이른바 연쇄반응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방향을 상실했고, 시대착오적인 왕정복고를 꿈꾼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적어도 식민지 지배에 대항할 민족주의적 반항의 씨앗이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이 사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인도인들도 관공서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또한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간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내각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 하부기관으로 15명으로 이루어진 인도 참사회가 구성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대두

 

영국인들의 지배가 확대되고 견고해질수록,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들의 민족의식도 깨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의 국정 참여 범위를 확대시켜달라는 정도의 소박한 요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종교와 사회 전반의 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최초의 종교·사회 개혁 운동은 벵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브라마 사마지(Brahmo Samaj)이다. 일종의 종교적 결사체인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람모한 로이이다. 그는 벵골의 비슈누파 브라만가에서 태어난 정통 힌두교도였으나 이슬람 및 서구 사상도 공부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에 일신교적 색채를 부여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힌두교도의 전통적 관습 및 종교의례 등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유아혼(幼兒婚)의 폐지와 교육의 기회 균등, 이혼의 자유, 과부의 지위 개선 등 불합리한 사회제도 및 관습 전반에 대해 비판하고 나아가 철폐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그는 카스트 제도의 철폐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 브라마 사마지는 이후 데벤드라나트 타고르(1817~1905)와 케샤브 찬드라 센(1838~84) 등을 지도자로 받아들여 교육의 기회 개방, 병원 등 후생시설의 건립 및 그밖의 사회봉사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 유사한 사회 개혁단체로 구자라트 출신의
다야난다 사라스바티(1824~83)가 주도한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가 있다. 그는 브라마 사마지가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받았던 데 비해 고유의 힌두교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인도인들의 종교 순화에 힘썼다. 아리아 사마지도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 특히 교육수준의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인도 고대문화에로의 복고적 성향 때문에 민족주의적 저항을 뒷받침하는 사상으로서 훗날 인도의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도 같은 경향의 운동단체로서 베단타 철학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상을 접목한
라마크리슈나 선교회, 미국에서 설립되었으나 인도의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지학협회 등이 있다. 이들의 개혁운동은 종교적 배경과 그 추구하는 이념이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모두 종래의 화석화된 힌두교 교의와 전근대적인 사회 관습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인도 고전사상의 재인식과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인도의 일체화를 꿈꾸고 있던 도시의 중간계층이나 지식인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점에서도 이들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각성은 그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를 그들의 민족지도자로 맞이하게 되면서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국부(國父)로 전세계적인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비폭력무저항주의(ahimsṃ)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사상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유럽열강들의 인도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의 전분야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그후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 영국인들의 직접적·간접적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인들의 언어나 생활관습의 변화까지도 초래할 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영국인들의 진출 거점이었던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봄베이(지금의 뭄바이)·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등을 중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서구식 사고를 겸비한 신중간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교육·종교·저널리즘 및 사상에 있어서도 영국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 사상에도 접할 수 있었던 만큼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사회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재판소·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다시 말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지 인도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결과 변호사·의사·교사 등의 직업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계층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사회조직의 최상층부는 영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특권과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차츰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한계와 민족적 일체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민족운동의 저변에는 이러한 신교육세대 및 새로운 직업계층의 인도인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동류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 신교육세대가 중심이 되어 훗날 반영 민족주의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또한 이들 중에서 장래의 인도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간디·네루 등의 예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받은 사회적·문화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유문화와 사상을 간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인도가 현대와 고대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인도인들의 가치관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자극받은 인도인들은 범국민적인 반영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선두에는 간디가 서 있었다. 영국제품 불매운동, 물레의 장려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전인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인도인들은 조국애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색인:아힝사, 보이콧).

 

이러한 간디의 민족주의운동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영국은 강압정책을 병행하면서도 차츰 인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인도의 연방화를 논의한
원탁회의(1930~32)와 뒤이어 공표된 1935년법 등이다. 이 법은 전인도의 연방제 지방자치의 허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연방제의 구상에 대해 인도 국민회의측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와 각 지역을 대표할 책임정부 및 연방입법부의 선거방법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 영토 편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실질적인 자치권의 확보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인도 전역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각 정파간에도 알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내외적 여건은 인도의 독립에 밝은 빛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우선 영국의 정권 교체와 이에 따른 정책 변화를 들 수 있다. 영국은 1945년의 선거에서 보수당이 퇴진하고 노동당이 새로 정권을 잡았다. 노동당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도의 독립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족주의운동 단체들이 인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영국측에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인도의 독립을 점점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영국의
애틀리 정부는 1947년 2월, '1948년 6월 이전에 책임 있는 인도인 단체에게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국민회의파 중심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반은
네루가 맡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힌두교도들과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사상자도 7,000여 명에 달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에는 2개의 공화국, 즉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과도기적 임시정부 형태였지만 3년후인 1950년 인도는 완전 독립했다. 한편 파키스탄은 1956년 이슬람 공화국을 선언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두 나라는 민족적인 갈등과 종교문제로 끊임없는 분쟁에 휩싸여왔다.

 


19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을 시행해 주권재민의 연방제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연이어 제1회 총선거가 소선거구제로 실시되어 국민회의파는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굳혔다. 1951년 4월에는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어 토지개혁의 추진과 함께 공업화계획이 본격화되었다(→ 색인:산업화).

 

제1차 5개년계획은 농업 면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내정 면에서 주목받는 것은 1955년 1월에 시작된 국민회의파대회에서 인도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형 사회'가 설정된 점이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엄밀히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루 정권은 대외적으로 비동맹외교정책을 내걸었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평화5원칙을 고수했다.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네루는 이집트의 나세르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1956)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언어별 주(州) 재편성의 도입(1956)으로 하나의 전기를 맞이했다. 인도가 많은 언어와 민족으로 구성된 이상 언어별 주행정구역의 확정은 인도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독립 인도의 정치사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즉 제2회 총선거로 신설된 게랄라 주에서 인도공산당이 제일당이 되어 몇몇의 다른 좌익정당과 연합해 주 정부를 장악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좌익성향의 게랄라 주정부는 1959년에 대통령중심제가 도입될 때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며, 국민회의파 중앙정부가 내건 정책의 혁신적 부분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네루를 선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이 '좌익정권'의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고 대외적으로도 티베트 문제에 대해 내정불간섭원칙을 버렸다. 1962년에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 발생한 군인간 무력충돌 결과 인도군의 패배는 네루의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인도의 제2차 5개년계획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 색인:중국-인도 국경분쟁). 1964년 네루의 사망은 인도의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7년 인도정치는 전독립 인도사에서 전환점을 맞이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제4회 총선거의 결과 종래의 연방과 여러 주를 장악한 국민회의파의 일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연방은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주는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정부가 서벵골과 게랄라의 두 주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타밀나두 주에서는 드라비다 진보연맹이 국민회의파를 누르고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대해 인디라 간디 총리는 강권정치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모색했다. 즉 인권탄압과 주 자치의 핵심을 제거하는 것이 그녀의 기본전략이며 관리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생활불안이 만성화하는 가운데 1975~77년 비상사태선포를 강화해 인도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7년 제6회 총선거 결과 독립 후 만년 여당이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처음으로 패배하고 대신 자나타(인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자나타당에 거는 민중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자나타당은 비상사태 이전으로 정치를 되돌린다는 의지가 약했다. 자니타당은 애초부터 당내의 권력투쟁에 시간을 허비하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침내 1978년 인디라 간디가 정계로 복귀했고, 1980년 제7회 총선거에서 재집권했다. 기적적으로 정계로 복귀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이전처럼 강권정치를 속행했다. 1980년대 펀자브 주의
시크교도는 일제히 국민회의파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녹색혁명의 모범적인 주로 간주된 펀자브 주가 농업 중심의 주로 고정되어 공업투자가 보류되자 시크교도들 사이에는 카스트 신분제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만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

 

1984년 6월 시크교도 가운데 일부 과격파가 굳게 버티고 있는 시크교도 총본산에 대한 정부군의 무력진압은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 총리에는 그녀의 맏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취임했다. 국민회의파 정권은 외국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내의 독점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계급을 기본적인 지지세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또다른 혁신정책이 마련되지 않아 이들은 국민회의파에서 유능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을 견제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회의파가 펼친 정치적 현실이 인도의 모든 정치적 현실은 아니다. 1967년 이래 인도정치의 다원적 지도와 민주화의 진행은 서벵골 주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전선정부의 지속적인 정치활동으로도 확인된다. 서
벵골 주 민중의 생활향상과 민주화에 대한 확대된 요구는 인도정치에 발전과 활성화를 가져다준 계기가 되어 전인도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89년에 네루 일가(인디라 간디와 그 아들 라지브 간디)의 권력독점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비스와나스 정권은 1990년 종교 분쟁과 계급갈등으로 인한 집권 국민전선의 붕괴로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의 지지로 셰카르가 정권을 승계했으나 1991년 3월 국민회의파의 간섭과 비협조를 이유로 사임했다. 그 결과 벤카타라만 대통령이 하원을 해산했고 같은 해 5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총선의 선거 유세 과정에서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남부에 갔다가 테러리스트의 총격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는 동정표가 급증하여 과반수 의석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제1당의 위치를 확보했고, 1991년 6월 21일 제9대 총리에
라오 국민회의파 총재가 취임했다(→ 색인:인도 국민회의당).

 

그러나 1992년 12월 6일 과격 힌두교도의 아요디아 시 소재 바브라 회교사원 파괴로 종교분쟁이 확산되었다. 이 분쟁으로 1,000여 명 이상이 사망하고 분쟁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인접 이슬람교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S.A. Wolpert 글

 

<파키스탄>

 

 
اسلامی جمہوریہ پاکِستان
파키스탄의 국기 파키스탄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ایمان ، اتحاد ، نظم
(이만, 이티하드, 나즘)
신뢰, 단결, 훈련
국가: 카우미 타라나
파키스탄의 위치
수도 이슬라마바드
33°43′00″N 73°04′00″E / 33.716667°N 73.066667°E / 33.716667; 73.066667
최대 도시 카라치
24°51′36″N 67°00′36″E / 24.8600°N 67.0100°E / 24.8600; 67.0100
공용어 우르두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공화국
대통령
총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유수프 라자 길라니
독립
• 독립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
1947년 8월 15일
면적 803,940 ㎢ (36위)
 • 내수면 비율 3.1 %
인구
 • 2006년 어림 163,803,560명
 • 인구 밀도 206명/㎢ (53위)
GDP (PPP) 2007년 어림값
 • 전체 $4,756억 (25위)
 • 일인당 $3,004.5 (125위)
HDI 0.562 (139위, 2006년 조사)
통화 루피 (ISO 4217: PKR)
시간대 PST (UTC+5)
 • 여름 시간 없음
ISO 3166-1 586
ISO 3166-1
alpha-2
PK
ISO 3166-1
alpha-2
PAK
인터넷 도메인 .pk
국제 전화 +92

 

파키스탄(우르두어: پاکستان)은 남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우르두어: اسلامی جمہوریہ پاکِستان 이슬라미 줌후리예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은 전 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전 세계에서 2번째로 이슬람교도가 많은 나라이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며 주요도시로는 카라치, 라호르, 라왈핀디 등이 있다.

2011년 5월 13일 이 나라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최소 80명이 사망하였다.

 

[편집] 역사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 당시에는 인도와 합쳐져 있었으나 종교적 이유로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13년 동안 군정의 지배를 받았으나 1971년에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동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서파키스탄만이 남게 되었고 이 전쟁의 영향으로 아히야 칸 대통령이 사임하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선출되면서 군정 시대가 종식되었다. 부토는 새 헌법에 따라 총리가 된다.

 

그러나 1979년 무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쿠데타로 부토 총리를 사형시키고 대통령이 되었다. 하크는 독재자로 군림하며 카리스마적이고 인기를 얻었으며 각국간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했으나 1988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이슬람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 베나지르 부토가 선출되어 2번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부패 혐의로 모두 실각했다.

 

1999년 다시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어 군림하다가 2008년 8월 18일에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임되고,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이었던 자르다리가 새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

[편집] 지리

파키스탄의 총면적은 803,940 km²로 세계에서 34번째로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보다 약 8.2배 더 넓고,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도 3.7배나 더 넓다.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해가 있어 바다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서쪽으로는 이란과 각각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쪽과 서쪽은 산악지대로 되어 있는데, 카슈미르 지역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 등 세계에서도 높은 봉우리들이 많다.

 

서부 중앙의 발루치스탄 지역은 높은 사막 고원지대로 되어 있고, 중앙의 펀자브 지역인더스 강이 지나고 있어 파키스탄에서 가장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편집] 행정 구역

1960년대에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단순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나,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한 이후에 현재의 파키스탄인 서파키스탄은 네 개의 주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현재 파키스탄은 4개의 주요 지역(펀자브, 신드, 발루치스탄연방통치 북부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1. 발루치스탄 주
  2. 북서 변경 주
  3. 펀자브 주
  4. 신드 주
Sub Pakistan.png
특별행정구역
  1. 이슬라마바드 수도권
  2. 연방 직할 부족 지역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지역(아자드 카슈미르)
  1. 아자드 카슈미르 주
  2. 길기트발티스탄 주

[편집] 기후

기후는 세가지 형으로 구분된다.

  1. 북부 산악 지방: 고산성 기후
  2. 중앙의 펀잡 지방: 스텝 또는 온대하우(溫帶夏雨) 기후와 여름에는 몬순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아지고 비가 내리며, 겨울은 서늘하다.
  3. 남부, 남동부 (신드지방, 타르사막), 남서부(발로치스탄) 지방: 스텝과 사막의 건조한 기후.

[편집] 정치

정부
파키스탄은 대통령이 국가의 수장인 의회제도와 총리가 정부의 수장인 정부형태를 가지고 있다.
의회
의회는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 상원:파키스탄 상원 의회
  • 하원:파키스탄 국회
사법제도
대법원과 각 지역에 고등법원 그리고 그 외 법원에서 민 형사 관련 사법권을 행사한다.

[편집] 주민

[편집] 인구

파키스탄의 인구는 2005년 현재 162,419,946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는 세계에서 브라질에 이어 여섯 번째로 많은 것이다.

 

1980년대에는 높은 인구증가율로 인해 2050년경에는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질 것으로 예측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이후 인구증가율이 급격히 낮아져 현재의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편집] 민족 구성

[편집] 언어

법적으로 우르두어를 국어라고 지정했을뿐 공용어의 지위는 없다. 게다가 우르두어를 국어라고 한 조문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가 있다. "공용어가 영어의 역할을 대체할 때까지는, 영어는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즉, 실제적으로는 영어가 공용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수준에서는, 신드주만이 신드어와 우르두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뿐, 나머지 지역은 우르두어가 유일한 공용어다.

[편집] 종교

파키스탄 인구의 대부분은 이슬람교을 믿고 있으며, 그 중에서 수니파가 75%, 시아파가 20%를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 외에는 기독교인이 2.5%로 가장 많으며, 그 밖에도 소수의 힌두교도, 불교도, 조로아스터교도, 시크교도 등이 있다. 이 중 기독교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탄압받는 종교이지만, 무샤라프 대통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을 전망이다.

 

파키스탄의 종교인구의 구성은 영국령 인도의 분할에 의해 크게 바뀌었는데, 영국령 인도가 인도와 동서 파키스탄 등으로 분할 독립할 당시 7백만 명의 무슬림이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동했고, 반대로 6백만 명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동하여 파키스탄에서 무슬림은 더욱 더 큰 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파키스탄은 시크교대승 불교, 그리고 밀교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편집] 교통

교통은 카라치에서 인더스강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라호르·라왈핀디를 거쳐 페샤와르를 지나 카이바르 고개에 이르는 옛 실크로드가 간선도로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하고 오래된 철도망이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의 세 나라에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영국령 시대에 부설된 것들이다.

 

파키스탄 철도의 총연장은 8,163km[2]로 주로 1,676㎜ 궤관의 광궤이다. 1960년 이후 계속적으로 전철보다는 디젤기관차를 채용하는 움직임이 강하다.[3] 철도도 간선도로와 같은 방향으로 건설된 노선의 교통량이 가장 많다. 대중 교통수단으로는 택시, 버스, 오토 릭샤, 마차가 있다.[4]

[편집] 대외 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대한민국과는 1983년에 수교하였다.

 

일본은 파키스탄과 대체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 피폭국이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핵실험을 이유로 거리를 둔 시기가 있었다. 일본은 1998년 지하 핵실험 때부터 2005년 4월까지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었다. 그러나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 등으로, 안보의 관점에서 볼 때 중동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파키스탄과 협력할 필요를 느낀 일본 정부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파키스탄 방문을 계기로 유상 자금 지원을 재개하였다.

 

1990년 1월 인도 관할 카슈미르 지역 내 무슬림들이 인도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를 진압하려는 인도 보안군과의 유혈충돌로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인도는 이 소요사태가 파키스탄 측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위자 현장 사살 명령을 하달하고 2월에는 대규모 병력을 국경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또 5월에는 국경봉쇄 등 강경조치를 취함으로써 인도-파키스탄 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5]

 

<방글라데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গণপ্রজাতঁত্রী বাংলাদেশ
방글라데시의 국기 방글라데시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나의 금빛 벵골
방글라데시의 위치
수도 다카
23°42′00″N 90°22′30″E / 23.7000°N 90.375°E / 23.7000; 90.375
공용어 벵골어
정부 형태 공화정
대통령
총리
질루르 라만
셰이크 하시나
독립
• 독립선언
 • 승인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
1971년 3월 26일
1971년 12월 16일
면적 143,998 ㎢ (94위)
 • 내수면 비율 7.0 %
인구
 • 2005년 어림 141,822,000명
 • 2001년 조사 129,247,233명
 • 인구 밀도 985명/㎢ (11위)
GDP (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3056억 (31위)
 • 일인당 $2011 (143위)
HDI 0.524 (147위, 2006년 조사)
통화 타카 (ISO 4217: BDT)
시간대 BDT (UTC+6)
 • 여름 시간 UTC+6
ISO 3166-1 050
ISO 3166-1
alpha-2
BD
ISO 3166-1
alpha-3
BGD
인터넷 도메인 .bd
국제 전화 +880

 

방글라데시(벵골어: বাংলাদেশ 방을라데시) 또는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벵골어: গণপ্রজাতন্ত্রী বাংলাদেশ 거너 쁘로자떤뜨리 방을라데시, 문화어: 방글라데슈, 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은 남아시아에 있는 인민 공화국으로서 인도, 미얀마 그리고 벵골 만에 인접해 있다. 인도의 서벵골 주와 더불어 벵골어를 쓰는 지역에 속한다.

국명 방글라데시는 벵골어로 "벵골어를 쓰는 땅"을 뜻한다.

 

[편집] 역사

현재 방글라데시라 불리는 지역에는 옛부터 문명이 발달하였다.

 1000년이슬람인들은 벵골(Bengal) 지역에 있는 힌두와 불교 왕국을 침략하여 왕권을 빼앗았다.

 

그로 인하여 벵골 동부의 대다수 주민을 이슬람교도로 개종시켰으며 서부 벵골지역에도 소수 이슬람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로부터 이슬람교는 이 지역의 역사와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세기 후반 벵골지역에 도착한 첫 유럽인은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이었다. 뒤를 이어 네덜란드,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잇달아 벵골에 나타났다. 18,19세기 동안 영국은 점차 인도의 캘커타에서부터 벵골에까지 그들의 상업적, 정치적 세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 영국 지배하의 인도에는 애국운동이 펼쳐졌으나 이로 인하여 힌두교와 이슬람교인 사이에 적대관계가 형성되었다. 이후 양 진영에서는 각각 자신들을 대표하는 당을 만들고 영국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권을 찾고자 노력하였으나 이슬람교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방법을 찾는 데는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이슬람인들의 당(黨)인 전인도무슬림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은 1935년 인도에서 첫 선거에 패배한 후 1940년 이슬람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을 독립주로 선언하였다. 그후 이로 인하여 캘커타 등지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47년 인도가 자치권을 회복하고 벵골지역을 종교에 의해 이슬람교인의 동파키스탄과 힌두교인의 서벵골로 분리하였다.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파키스탄 내에서 벵골의 무지브(Mujib)는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신장하기 위하여 AL(Awami League:아와미연맹)을 만들었다. 그후 무지브는 AL의 대표로서 벵골 자치운동을 벌였다. 1970년대 무지브는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AL당은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1년 3월 26일 파키스탄군의 유혈 진압에 맞서 벵골 애국주의자들은 독립된 방글라데시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후 파키스탄군(軍)과 벵골 자유 투사들 간의 전투가 가열되자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1,000만 명에 이르는 힌두교를 믿는 벵골인들이 인도의 아삼, 서(西)벵갈 등지로 피신하였다.

 

 인도의 지원 속에 결국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군대는 항복하고 벵골 국가라는 뜻의 방글라데시가 탄생하였다.

 

1972년 헌법에 의해 방글라데시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나 그 후 약 30년간 정치적인 혼란과 부정이 만연했는데 13명의 행정 수반 중 초대 대통령 세이크 무지부르 라만과 후계자 지아울 라만 등 2명이 암살당했고 쿠데타가 4번 이상 일어났다.

그 뒤 2번의 적법적인 정권 교체가 있었으나, 이슬람 테러라는 국가적인 위험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2008년 12월 17일 0시 1분부터 국가 비상사태를 해제했다.[1] 2년간의 비상사태가 해제된후 방글라데시에서 7년 만에 처음 치러진 87%의 선거율을 기록한 총선에서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가 이끄는 연정이 의회 총 300석 중 245석을 확보한 가운데, 제 1야당은 31석을 얻는 데 그쳤다.[2][3]

[편집] 자연 환경

[편집] 지리

인도 접경과 갠지스 강 삼각주 지역은 지대가 낮지만 미얀마 국경으로 가까워 질수록 지대가 높아진다. 지리적으로 비옥한 갠지스 강 삼각주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편집] 기후

세계에서 가장 비가많이 오는 지역중 하나이다. 매년 몬순 홍수와, 사이클론이 있다.

[편집] 행정 구역

Bangladesh divisions english.png

방글라데시는 7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의 명칭은 각 구의 주도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방글라데시에서 구 다음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은 현이며 방글라데시에는 64개의 현이 있다.

[편집] 정치

[편집] 외교

방글라데시는 남아시아 지역협력협의체(SAARC)BIMSTEC의 창립 국가이며, OICD-8에 참여하고 있다.

[편집] 대한 관계

방글라데시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시수교국이다. 대한민국과는 1973년 12월 18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편집] 군사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편집] 경제

[편집] 산업

방직산업이 최근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낮은 임금으로 매년 156억 달러의 방직물을 수출하고 있고 이는 방글라데시 전체 수출규모에 80%에 육박한다. 그러나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공급망 인프라를 확보하지 못하고, 잦은 홍수와 자연재해로 인해 성장에 제한받고 있어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4]

[편집] 교통

중요 교통로는 수로이며 약 7,240㎞ 정도에 이른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데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기적으로 다닌다. 육상교통은 덜 발달된 상태로 철도는 약 2,900㎞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하고 오래된 철도망이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의 3개국에 나누어져 있다. 이것은 영국령시대에 부설된 것들이다. 방글라데시쪽의 철도는 태반이 1,000㎜ 게이지이다. 1960년 이후 계속적으로 전화(電化)보다는 디젤기관차를 채용하는 움직임이 강하다. [5]

대중교통수단으로 인력거(릭샤)가 있고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2인용 베이비택시와 10인용 템포는 공해의 주범이다. 다카에 국제공항이 있다. [6]

[편집] 사회

[편집] 주민

주민은 벵골어를 사용하는 사람인 벵골인이 대부분으로, 인구의 98%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르두어을 사용하는 비하르 주인도 출신으로 하는 비(非)벵갈인 이슬람교도가 2%를 차지한다. 그 밖에 남동부의 치타공 구릉지대에는 10개 이상의 민족이 존재한다.이들중 소수민족인 줌마족의 경우, 방글라데시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어서 대한민국의 일부 줌마족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은 민중운동으로 이에 저항하고 있다.

[편집] 인구

방글라데시는 싱가포르바레인 등 면적이 작은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이다. 방글라데시의 총 인구수는 2008년 현재 약 1억 5354만 6900명으로, 이 수치는 방글라데시보다 영토가 훨씬 넓고 광활한 러시아보다 약 천만명 정도가 더 많은것이다. (러시아의 인구는 약 1억 4천) 면적은 그리스보다 10% 더 크지만, 인구는 14배로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다. 면적 1km²당 인구는 2004년 현재는 982 명이고, 인도네시아자와 섬과 비교된다.

 

 인구 폭발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1992년부터, 산아 제한에 의한 인구 조절을 추진하면서 인구 증가를 억제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성과가 올라가고 있지만, 인구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편집] 언어

벵골어가 공용어이다. 문자는 데바나가리 문자와 비슷한 벵골 문자를 이용한다. 유일한 공용어는 벵골어이지만 교육기관에서는 영어 사용도 허용되어 있다. 일부는 미얀마어, 우르두어, 아랍어, 힌디어도 사용된다.

 

전반적으로 공영어인 벵골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다. 대한민국과 같이 모국어의 날이 있고, 파키스탄과의 독립전쟁의 계기도 파키스탄의 우르두어의 사용 강요였다.

[편집] 벵골어 단어

  • 빠니 : 물
  • 따라따리 : 빨리 빨리
  • 아스떼 아스떼 : 천천히
  • 셔깔 : 아침
  • 마따 : 머리
  • 벵어 마따 : 개구리 머리
  • 무르기 마따 : 닭 머리
  • 바(빠)똘 마따 : 돌머리
  • 돗노밧 : 고맙습니다

[편집] 심각한 문맹

방글라데시의 문맹율은 아주 높다. 택시기사들이 관광객에게 호텔에서 나눠주는 호텔이름조차 못 읽는 경우가 많으며, 총선거가 실시될 때 벽보나 홍보 책자에 실리는 후보자를 구분하기 위해, 각색의 동물이나 물건(예컨대, 호랑이, 망고, 걸상, 비행기 등)의 그림으로 구분하여 적어야 한다. 방글라데시 민중들에게 배움이 없다는 현실은 곧 정치적, 경제적 부정부패과 비리의 온상이 된다.

 

민중들이 머리가 깨어 있다면, 감히 부정과 비리를 저지를 수 없을 것이고 발생한다고 해도 민중들이 단결하여 대한민국4.19 혁명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북아프리카재스민 혁명(튀니지 혁명)과 이집트 혁명같은 혁명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문해율은 47% 정도로 다섯 명 가운데 두 명만 글을 읽을 수 있다.

[편집] 문화

[편집] 종교

종교는 이슬람교가 89.7%, 힌두교가 9.2%, 기타가 1%이다. 세계에서 무슬림이 많은 국가 중에서는 두 번째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데, 그 수는 무슬림이 소수인 인도의 무슬림 인구보다 조금 적다. 기타 종교에는 불교, 로마 가톨릭, 개신교, 방글라데시 성공회, 부족종교가 포함된다. 이 나라의 종교 분쟁은 심각하여 같은 무슬림인데도 비하리 부족의 경우 방글라데시 시민권을 거부하여 차별받고 있다. 또한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기독교인 등의 소수 종교인들도 방글라데시 국민임에도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네팔>

 

सँघिय लोकतान्त्रीक गणतन्त्र नेपाल
네팔의 국기 네팔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जननी जन्मभूमिष्च स्वर्गादपि गरियसि
(어머니와 조국의 대지는 천국보다 좋다.)
국가: 백송이의 꽃
네팔의 위치
수도 카트만두
27°42′00″N 85°19′00″E / 27.7°N 85.316667°E / 27.7; 85.316667
공용어 네팔어
정부 형태 공화제
대통령
총리
람 바란 야다브
바부람 바라타이
독립
• 왕정 수립
 • 과도정부 수립
 • 공화정 수립

1768년 12월 21일
2007년 1월 15일
2008년 5월 28일
면적 147,181 ㎢ (93위)
 • 내수면 비율 2.8 %
인구
 • 2008년 어림 29,519,114명
 • 2003년 조사 23,151,423명
 • 인구 밀도 184명/㎢ (56위)
GDP (PPP) 2006년 어림값
 • 전체 $481.8억 (87위)
 • 일인당 $1,50 (164위)
HDI 0.530 (145위, 2006년 조사)
통화 루피 (ISO 4217: NPR)
 • 여름 시간 없음
ISO 3166-1 524
ISO 3166-1
alpha-2
NP
ISO 3166-1
alpha-3
NPL
인터넷 도메인 .np
국제 전화 +977

 

네팔(네팔어: नेपाल, 영어: Nepal)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북쪽으로는 중국, 동서남으로는 인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부탄이 있다.

 

2006년까지는 이 나라의 공식 국명이 네팔 왕국(네팔어: नेपाल अधिराज्य 네팔 아디라쟈)이었다. 2007년 1월 15일에 왕정이 사실상 종식되고 과도정부로 정치체제가 변경되었으며, 2008년 5월 28일네팔 연방 민주 공화국(네팔어: सँघिय लोकतान्त्रीक गणतन्त्र नेपाल Saṃghiya Loktāntrīk Gaṇatantra Nepāl)이 되었다.

 

 2010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민주 공화국이 된 나라이다. 147.181㎢의 영역과 약 3천만명의 인구를 가진 네팔은 세계에서 93번째로 넓은 나라이고, 41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는 네팔에서 가장 큰 대도시이다.

 

네팔은 다양하고 풍부한 지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북부 산악지대는 에베레스트 산을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산 중 8개가 분포해있다. 비옥하고 습한 남부는 매우 도시화되어 있다.

 

네팔 국민의 대부분은 힌두교를 믿는다. 비록 불교는 소수 종교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네팔이 석가모니의 탄생지라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다.

 

[편집] 국명과 역사

[편집] 국명

네팔이라는 국명의 기원은 네팔의 수호신인 'ने'(Ne)와 보호라는 의미의 'पाल'(pal)을 사용하여 직역하면 '신의 보호'라는 뜻을 가진다.

[편집] 역사

1768년 12월 21일에 독립하였으나 1847년 이후에야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네팔의 국왕 참고) 그 동안 네팔은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으로 패배하여 독립 당시의 많은 땅을 영국의 식민지로 인정해야 했다. 이 때부터 최초의 국기가 처음 사용되었다.

 

1923년 당시의 국기는 지금의 네팔 국기와 같으나 사람의 얼굴 모양이 있었다. 1962년에 왕이 바뀌자 국기도 지금처럼(얼굴 완전히 삭제) 바뀌었다. 원래 이 나라는 양의 왕조와 음의 왕조가 교대로 통치하였다고 한다(물론, 현재는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1990년 입헌 군주제로 변경되고 1994년 총선에서 네팔 통일 사회주의 당이 정권을 잡았다. 1996년 마오쩌둥공산주의 이론을 따르는 마오이스트(Maoist)들이 네팔 인구의 37.8%를 차지하는 네팔 원주민(자나자티스)를 인적자원으로 한 무장투쟁을 시작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무장투쟁 지도자는 현 네팔공산당 (마오이스트) 프란찬다 당수이다.[1]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던 비렌드라 전 국왕은 네팔 왕실 대학살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2001년도에 즉위한 갸넨드라는 총리를 '공석'으로 간주하여서 네팔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2006년 4월에 대국민 TV 사과문을 발표하였으나 내전은 11월에 끝났다.

 

2007년도에 들어 네팔 사람들은 239년이나 지속된 군주제를 원망하게 되었다. 결국, 2007년 12월 23일 네팔은 국민 투표를 따라 군주제 폐지를 결정했다.[2] 2008년 5월 28일에 네팔 제헌의회가 첫 회의를 열고 압도적인 찬성 속에 왕정 폐지와 공화정 도입을 골자로 한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239년 동안 이어졌던 왕정체제가 끝나고 공화제로 변경되었다.[3]

 

궁을 비우라는 의회의 통첩을 받았던 네팔의 왕과 왕비는 2008년 6월 11일 카트만두의 궁을 떠났다. 군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궁전을 떠났으며 일부 왕의 지지자들이 앞길을 막는 시도도 있었다. 왕이 거주하던 궁은 박물관으로 변경될 예정이다. 네팔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될 갸넨드라는 국민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히며 네팔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4월 제헌의회 총선에서는 네팔공산당 (마오이스트)가 전체 의석의 1/3 이상을 차지하며 제1당으로 올랐으나, 2008년 7월에 열린 열린 선거에서 제헌의회는 국민회의당의 람바란 야다브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2008년 8월 15일, 제헌의회 투표에서는 네팔공산당 (마오이스트)의 프라찬다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편집] 지리

에베레스트

 

네팔은 길이 650km, 너비는 200 km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이며, 전체 면적은 147,181 km²로 세계적으로는 94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티베트 자치구, 서쪽으로는 인도우타라칸드 주, 남쪽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 주비하르 주, 동쪽으로는 시킴 주웨스트벵골 주에 접하는 내륙국이다. 국경 길이는 총 2926km, 그중 중국 국경은 1236km, 인도와의 국경 1690km에 달한다.

 

네팔은 비교적 작은 국가이나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펼쳐져 있는 습지와 중국과의 경계에 있는 히말라야 등 고산지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곳이 많다. 네팔은 자연, 지리학적으로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산악 지대, 언덕 지대, 그리고 습지대로 나뉘는데, 이러한 구분은 정부의 지역 개발 계획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중국 국경 지대에는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8000m 급의 높은 봉우리를 포함한 히말라야가 존재한다. 따라서 고산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인도와의 국경 지역은 "타라이" "테라이" 또는 "마데스"라고 하는 고온다습한 평원 지대가 있고, 비옥한 땅이다. 그 중간에는 언덕이 펼쳐진다. 최고지는 에베레스트로 해발 8850m. 최저지는 해발 70m이다.

[편집] 히말라야

중국 국경에 접하는 네팔 북부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8000m급의 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고산 지대이며, 많은 등산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고산의 산간에는 빙하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고산의 눈이 녹아, 빙하 호수의 종괴가 문제가 되고 있다. 빙하 호수가 무너지면서 대량의 토사에 의한 토석류가 발생하여 큰 피해가 발생한다. 특히 에베레스트 기슭에 있는 임쟈호수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팔의 주요 봉들은 다음과 같다.

[편집] 정치

카트만두 민주의 벽

 

정치는 민주공화정이며 국가원수는 람 바란 야다브(Ram Baran Yadav) 대통령(2008.7 취임)이다. 의회는 상.하 양원제으로 알려져있다. 네팔이 주요정당은 네팔의회당, 네팔공산당이 있다.

 

네팔은 2009년 현재 임시 헌법에 따라 임시 정부가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다. 2008년 5월 제헌 의회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헌법의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6년 민주화 운동(록탄트라 앤도란)의 결과, 기존의 사실상 절대군주국에서 잠정적으로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국왕은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를 잃고 총리가 그 직무를 대행했다. 국호는 "네팔 왕국"에서 "네팔"로 변경하고 재외 공관의 표기도 "왕국"이 삭제되었다. 왕실을 찬양하는 국가를 폐지하고, 왕실과 결합된 힌두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국왕은 국군통수권을 상실하고 정부도 "국왕 폐하의 정부"에서 "네팔 정부"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여당인 네팔회의당과 다른 여러 당에서 제안되었던 왕제 폐지에 찬성하는 것을 표명했다. 또한 임시 헌법에 네팔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이던 네팔공산당 모택동 주의자(Maoists)가 임시 정부 복귀 조건으로 했던 "왕제 폐지"와 "연방 민주공화제"가 포함되는 것이 정해져, 네팔의 국가 형태 이 왕제에서 공화제로 전환하는 것이 사실상 굳어졌다.

 

2008년 4월 10일 치뤄진 제헌 의회 선거(지역구 240, 비례 대표 335, 의회 임명 26)에서 프라찬다 의장이 이끄는 네팔공산당 모택동주의파가 229석(지역구 120, 비례 대표 100, 의회 임명 9)을 획득하여 제 1당이 되어, 네팔의회당이 115석(지역구 37, 비례 대표 73, 의회 임명 5), 통일공산당이 108석(지역구 33, 비례 대표 70, 의회 지명 5)을 차지하여 왕정 폐지파의 정당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왕정지지파 정당은 유일한 국가 민주당 네팔이 4석에 머물렀다. 같은 해 5월 28일 소집된 제헌 의회 첫 회의에서 찬성 560표, 반대 4표로 정식으로 왕제를 폐지하고 연방 민주공화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편집] 행정 구역

네팔의 행정 구역은 14개 지역 75개 군(district)이 존재하며, 5개 개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다. 수도카트만두이다. 포카라 등의 주요 도시도 존재한다.

[편집] 주요 도시

No  ↓ 도시명  ↓ 인구(1991년)  ↓ 인구(2001년)  ↓ 2005년 추계  ↓ 지방  ↓
1 카트만두 421.258 671.846 790.612 카트만두
2 포카라 95.288 156.312 186.410 카스키
3 랄릿푸르 115.865 162.991 183.316 라릿푸르
4 비랏나가르 129.388 166.674 168.331 모란
5 빌간지 69.005 112.484 133.244 파르사
6 다란 66.457 95.332 128.605 슨사
7 바랏푸르 54.670 89.323 117.162 치트완
8 마헨드라나가르 62.050 80.839 99.124 칸찬푸르
9 부터왈 44.272 75.384 91.737 루판데히
10 헤타우다 53.836 68.482 84.800 마칸푸르

[편집] 교통

네팔은 세계적인 주요 육로, 항로, 해로 교통으로부터는 고립되어 있으나 국내에서는 항공 교통의 사정이 비교적 나은 편이다. 48개의 공항이 있으며 그 중 10개는 포장된 활주로가 있다. 항공편이 자주 있으며 어느 정도 규모의 교통량을 보이고 있다. 이 나라의 3분의2를 차지하며, 언덕과 산이 많은 북부 지역에서는 도로나 다른 기반시설을 만드는 것이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든다. 2003년 기준, 포장도로는 8500km이었고, 철도는 남부에 있는 59km짜리 한 개가 유일하였다. 이로서 철도 밀도는 4.00km/10,000㎢(세계 143위)에 불과하다.

 

 인도에서 카트만두 계곡으로 가는 믿을 만한 도로는 단지 1개 뿐이다. 카트만두 행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하게 실질적인 항구는 인도의 캘커타이다.

[편집] 사회

[편집] 주민

네팔인이 주로 거주하며 인도인이나 부탄인도 거주한다.

 

네팔의 인구는 2005년 기준으로 27,676,547명이며, 인구증가율은 약 2.2%정도이다. 연령분포를 보면 14세 이하가 39%, 15세부터 64세까지가 57.3%이고, 65세 이상 인구는 3.7%에 불과하여 평균연령은 20.07세(남성은 19.91세, 여성은 20.24세)으로 낮은 수준이다. 여자 1,000명당 남자 수는 1,060 명으로 남자의 수가 더 많다. 평균 수명은 59.8세(남자 60.9세, 여자59.5세)이다.

[편집] 언어

네팔어공용어로 인구의 약 90%가 네팔어를 구사하며, 힌디어, 종카어도 사용된다. 영어는 700만 명 정도가 2언어로 사용한다

[편집] 문화

과거 힌두교를 국교로 지정한 나라로써 이 나라 국민들은 지금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

[편집] 신문

  • 영어 일간지
    • 카투만두 포스트
    • 리싱네팔
  • 네팔어 일간지
    • Gorkhapatra
    • Kantipur

[편집] 방송

  • TV 방송국 3 개
  • 라디오 방송국 3 개

[편집] 종교

최근까지 힌두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로서 인도와 함께 대표적인 힌두교 국가이다. 신헌법이 2008년 6월 15일부터 발효되어 국교를 폐지했다. 현재 전 국민의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고 있다. 그외 소수종교로는 불교가 있다.

[편집] 교육

기본 학제는 '10+2 시스템'으로 초등학교 7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과정으로 되어 있다.

유명대학은 카트만두에 국립 Tribhuran대학(전국 각지에 100여개 캠퍼스 운영)이 있으며 총 학생수는 약 20만 명 정도이다.

[편집] 외교

네팔과 버마 양국 수상은 1960년 3월 9일 밤, 양국간의 외교관계수립을 발표하였다. [4]

[편집] 대한 관계

대한민국과 네팔의 공식적인 교류는 1969년 5월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69년 7월 영사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 1972년 6월 대한민국이 먼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주카트만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고, 1974년 5월에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총영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네팔에서는 2007년 3월 7일 주한 네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히말라야 등지로의 트레킹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네팔을 찾는 한국 관광객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데 2006년 11월 13일 대한항공이 주1회 카트만두로의 직항로를 개설하여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2007년 7월에 대한민국-네팔 간 '고용 허가제 방식의 네팔 인력 송출·도입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채결했는데, 이에 따라 네팔인들은 2008년 3월부터 세계한국말인증시험(KLPT)을 거쳐 합법적으로 한국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2010년 현재 네팔에서는 한국과 한국어 바람이 뜨겁다. 네팔 노동부에 따르면, 이 한국어시험에 응시한 사람이 4만2050명이다. 카트만두와 네팔의 방방곡곡에서 몰려온 젊은이들(18~38세)은 10.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4000명 이내에 들어야만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

 

 2004년 고용허가제 한국어시험이 도입된 이후 15개국에서 수십 차례 치러진 한국어 시험 중 이번 네팔 응시자가 사상 최대 인원이고 경쟁률도 최고다.[5]

 

1974년 6월 2일, 네팔과 북한은 외교관계를 대사급으로 승격하였다고 발표하였다. [6]

 

<부탄>

 

Drug Gyal-Khab
부탄의 국기 부탄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전룡의 왕국
부탄의 위치
수도 팀부
27°28′00″N 89°38′30″E / 27.466667°N 89.641667°E / 27.466667; 89.641667
공용어 종카어
정부 형태 입헌군주제
국왕
총리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지그미 요제르 틴리
독립
• 왕조 성립
왕조 성립
1907년 12월 17일
면적 47,500 ㎢ (130위)
인구
 • 2005년 어림 2,232,291¹명
 • 2003년 조사 734,340명
 • 인구 밀도 45명/㎢ (123위)
GDP (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29.13억 (162위)
 • 일인당 $3,330 (124위)
HDI 0.613 (131위, 2006년 조사)
통화 눌트럼,
인도 루피 (ISO 4217: BTN, INR)
시간대 BTT (UTC+6)
 • 여름 시간 없음
ISO 3166-1 064
ISO 3166-1
alpha-2
BT
ISO 3166-1
alpha-2
BTN
인터넷 도메인 .bt
국제 전화 +975

¹부탄 정부가 조사한 인구와 CIA의 추정 인구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부탄(종카어: འབྲུག་ཡུལ 드럭 율→용의 나라)은 인도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남아시아나라이다.

 

[편집] 역사

부탄의 옛 기록은 화재와 지진으로 소멸되어 신비에 싸여 있다.

 

8세기경에 Guru Padma Sambhava가 비호의 등을 타고 티벳에서 부탄으로 날아와 타루 벨리에 있는 호랑이의 거처인 Taktsang에 왔다는 전설이 있다.

 

부탄은 16세기부터 푸나카 사원의 대승정(大僧正) 다르마 라자의 지배를 받았고, 행정의 실무는 데프 라자(副王)가 행하므로 승·속(僧俗)의 이중 통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의 군(郡)에는 토후(土侯)가 있어서 그 지배력이 강하였다.

 

1907년 중부에 있던 통사군의 군수(郡守) 우겐 왕추크가 왕위(마하라자)를 선고하고 영국에 의해 유일한 왕조로 인정받음으로써 부탄에 군주제가 성립되었다. 이후 인도와 조약을 맺어 인도에 외교권을 위임하였고 1949년 8월 8일 독립하였다. 국왕 지그메 도르지 왕추크는 개화된 통치자로서 전통적 가치 보존과 함께 국가의 발전을 추구하려 하였다.

 

전(前) 국왕 지미 싱게 왕추는 제4대 왕으로 1972년에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후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2006년 즉위했으며, 2008년 입헌 군주제 수립을 위해 의회 선거가 2008년 3월 24일에 있었다.

[편집] 지리

부탄은 인도 북동부, 히말라야 산맥의 동단부에 있는 인도의 보호국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표고 2,000m를 넘고 고지에 있는 네팔보다 한층 더 원시적인 비경(秘境) 지대이다. 고지이기 때문에 기온은 비교적 온화하나 강우량이 많아 연간 3,000~5,000㎜ 정도나 된다. 그러나 계곡 바닥은 기온도 높아 아열대성 동식물이 있다.

 

부탄 왕국은 히말라야의 동쪽에, 북으로는 티베트와 남으로는 인도아삼 주벵갈 서부지방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약 47,000㎢로 중앙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고 산들로 둘러싸인 내륙 국가이다. 7,300미터에 이르는 히말라야 산맥티베트 고원과 경계를 이루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높이가 낮아지면서 비옥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계절풍(몬순)은 이 지역에 산림을 풍성하게 했으며 높은 곳에는 산악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경작이 가능한 중부와 히말라야 언덕에 인구가 밀집해 있다. 남쪽의 Daurs 평원은 히말라야 산맥 보다 고도가 낮아 아열대 숲과 열대 초원(사바나),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있다.

[편집] 행정 구역

부탄의 행정 구역은 크게 4개의 종데이(지역, dzongdey)로 나뉘며 이는 다시 20개의 종카그(현, dzongkhag)로 나뉜다. 부탄에는 총 20개의 종카그가 있다. 종카그는 다시 게워그(구, gewog)로 나뉘지만 규모가 큰 종카그는 다시 둥카그(특별 행정 구역, dungkhag)로 나뉘기도 한다. 수도팀부이다.

[편집] 정치

부탄은 히말라야 산중의 소국으로 1907년 우겐 왕추크가 즉위한 이래 세습군주제가 실시되고 있으며 1910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47년 인도독립과 함께 영국의 지배를 벗어났고 1949년 8월 인도로부터 데완기리 지방을 할양받고 매년 국고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인도에 외교권을 위임했다.

 

1964년 11월 궁정 쿠데타로 렌다프도르지 수상을 내쫓고 국왕이 친정을 베풀기 시작했으며 마하라자 왕추크 국왕이 사망하자 1974년 황태자인 지미 싱게 왕추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나라는 군주가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절대군주제 국가였으며, 총리 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2008년 3월 24일 부탄 총선이 실시되어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시행하였다.

[편집] 언어

종카어공용어이다. 네팔어, 티베트어, 영어도 사용된다.

세계총행복론을 제창한 이 나라의 문맹률은 40%로서, 3대 국왕인 도로지 왕추크 국왕이 1980년대 교육혁명을 통해 80%에 달했던 문맹률을 40%로 낮추었다.

[편집] 종교

부탄은 공식적으로 대승불교가 국교인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이다. 전통 불교라마 불교(75%)를 신봉하며, 국민의 신앙심이 두터워 국내 도처에서 초르텐[佛舍利塔]을 볼 수 있다. 교파는 구파(舊派)의 드룩파파(派)로, 티베트에서 주력을 이루는 겔루크파[黃帽派]와는 다르다. 그밖에 힌두교(25%)가 있다.

[편집] 경제

부탄은 농업과 목축이 주산업으로 계곡 바닥의 평지를 이용해서 ·보리·수수 등이 재배된다. 목축은 고지에 적응하는 소가 주로 연료용·육용·유용(乳用)으로 사육된다.

 

1948년부터 인도의 원조를 받기 시작하여 현재에도 예산의 대부분을 인도에 의존하고 있다. 매년 인도에서 약 50만 루피의 원조를 받으며 외화 수입은 보잘것이 없다.

 

주요 수출품은 목재·석탄·과일 등이다. 제7차 5개년계획(92 97)을 통해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탄의 주요 자원은 목재와 수자원이며, 산업은 농목업과 수공업이 지배적이다. 여전히 폐쇄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경제구조의 변혁도 부진하다. 북부지역에서는 해발고도 3,000 ∼ 4,000m의 하곡부에 취락이 발달하여 밀·보리·메밀·감자 등의 일모작(一毛作)재배를 하고, 더욱 높은 히말라야산맥의 초지지대에서는 야크·양·산양 등을 사육하는 목축지역이 전개되어 있다. 중부의 해발고도 1,200∼ 2,000m의 하곡지역은 따뜻한데다가 적당한 우량의 혜택을 입어 풍요한 농경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여름작물로는 쌀·옥수수, 겨울에는 밀·보리 등을 재배하는데 이들 작물은 평지뿐만 아니라 계단식 경작에 의하여 산기슭에서도 재배된다. 그밖에 귤·레몬·석류·바나나 등의 과수재배도 성하다. 남부의 구릉지역은 밀림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개발이 부진하다.

 

공업은 전통적인 수공업이 성행하고 있으나 모두 자급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대규모의 근대 공업은 아직 미약하다. 그러나 수공업기술은 매우 우수하여 깔개·안장덮개·배낭·자수품 등 예술적으로도 가치 있는 직물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또한, 금속세공 분야에서도 조각을 곁들인 칼자루나 종교장식, 그밖의 일반 장식품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광업활동으로서는 석탄과 구리의 채굴이 이루어지나 규모는 매우 작다. 부탄에서는 아직도 대부분의 수송이 등짐이나 노새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근년 국내외의 도로망이 정비되고 도로 총연장이 3,285km(1996)로 늘어남에 따라 부탄의 상업활동도 발전을 보이고 있다. 또 팀부의 남서쪽에 있는 파로에는 국제공항도 있다. 무역의 상대국은 주로 인도이며 수공업품과 목재를 수출하고 기계류와 공장설비 등을 수입하고 있다.

 

1961년부터 인도 정부 지원하에 8차에 걸쳐 5개년 개발계획을 시행해오고 있으며, 제1·2차 5개년 계획에서는 도로 건설 등에 대한 투자 및 교육의 보급 등 기본적 인프라의 정비에 중점을 두었고 제3·4차 계획에서는 농림, 광공업, 전력, 관광 개발 등에 중점을 두었다. 1997년 7월부터 실시된 제8차 5개년 계획에서는 인구 억제, 민간부문의 육성 등을 주요 과제로 하고 있다. 1998년 국내총생산 중 농업은 38%, 공업은 37%, 서비스업은 25%를 차지한다. 수출은 1억 1000만 달러, 수입은 1억 3000만 달러이다.

[편집] 문화

부탄 국민의 대부분은 티베트계의 부탄인이며 언어·종교·풍속·습관 등은 티베트와 비슷하다. 언어는 종카어를 사용하고 라마교를 신봉한다.

 

부탄 국민들은 국왕의 초상화에 아침, 점심, 저녁 순으로 기도를 하는 문화가 있다.

 

부탄 정부에서는 "환경 보호"라는 이유로 외국인 관광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 치안은 안전한데, 이것은 국왕의 칙령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부탄에서는 국왕의 칙령이 헌법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스리랑카>

 

ශ්‍රී ලංකා ප්‍රජාතාන්ත්‍රික සමාජවාදී ජනරජය
இலங்கை சனநாயக சோஷலிசக் குடியரசு
스리랑카의 국기 스리랑카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조국 스리랑카
스리랑카의 위치
공용어 신할라어, 타밀어, 영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대통령
총리
마힌다 라자팍사
디싸나야케 무디얀셀라게 자야라트네
독립
• 독립 선언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8년 2월 4일
면적 65,610 ㎢ (121위)
 • 내수면 비율 1.3 %
인구
 • 2009년 어림 20,238,000명
 • 2008년 조사 21,324,791명
 • 인구 밀도 308.4명/㎢ (42위)
GDP (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867.2억 (61위)
 • 일인당 $4,300 (111위)
HDI 0.742 (104위, 2006년 조사)
통화 루피 (ISO 4217: SLR)
시간대 UTC (UTC+5:30)
 • 여름 시간 (없음)
ISO 3166-1 144
ISO 3166-1
alpha-2
LK
ISO 3166-1
alpha-3
LKA
인터넷 도메인 .lk
국제 전화 +94
1972년까지는 "실론"이라고 불렀으며 영연방 입헌 군주제였다.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싱할라어: ශ්‍රී ලංකා ප්‍රජාතාන්ත්‍රික සමාජවාදී ජනරජය , 타밀어: இலங்கை சனநாயக சோஷலிசக் குடியரசு 스리랑카 프라자탄트리카 사마자바디 자라나자야)는 남아시아에 있는 섬나라이며 법률상의 수도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이고, 제일 큰 도시는 콜롬보이다.

 

[편집] 역사

예전에는 '실론'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었으며 한때 인도와 함께 영국의 속령이 되어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가 1948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였고 국호도 '실론' 에서 현재의 국호로 변경하였다.

 

이전까지는 콜롬보가 수도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정치 및 실질상 수도)와 콜롬보(행정수도)로 분류되고 있다.

 

2004년 12월 29일에 지진해일이 일어나 큰 피해를 보았다. 그리고 해일로 인해 사망자가 속출했다. 2007년 1월 22일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나 40명이 사망했다.


[편집] 이름

1948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였고 국호도 '실론' 에서 현재의 국호로 변경하였다. 고대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인도에서는 랑카(Lanka) 싱할라(Singhala) 등으로 불렀으며,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타프로바네(Taprobane)[1] (play /təˈprɒbən/), 아랍권에서는 Serendib ("세렌디피티"(serendipity) 말씀의 원조).[2] . which was transliterated into English as Ceylon.[3] As a British crown colony, the island was known as Ceylon, and achieved independence under the name Dominion of Ceylon in 1948.

In Sinhala the country is known as ශ්‍රී ලංකා śrī laṃkā, 틀:IPA-si, and the island itself as ලංකාව laṃkāva, 틀:IPA-si. In Tamil they are both இலங்கை ilaṅkai, 틀:IPA-ta. The name derives from the Sanskrit श्री लंका śrī (venerable) and lankā (island),</ref>[4] 고대 인도에서는 본 섬의 이름을 마하바라타(Mahabharata) 및 라마야나(Ramayana)로 불렀다.

 

1972년, 공식 국호를 "Free, Sovereign and Independent Republic of Sri Lanka"로 변경하였다. 1978년에도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 "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으로 변경하였다.[5]

실론(Ceylon)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많이 쓰인다.[6]

[편집] 지리

인도의 남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다. 과거에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인도의 눈물'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국토의 생김새가 꼭 눈물 혹은 진주처럼 생겼는데 지리적으로도 인도의 꼬리 쪽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국토의 면적은 6만 5610㎢로, 남한의 약 2/3 정도 된다고 한다. 정글에서부터 고산지대까지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다.

[편집] 사람과 언어

싱할라어타밀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싱할라어는 스리랑카인 대다수가 사용하는 고유의 언어이며, 타밀어은 근대 이후 영국인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본격 유입된 인도의 타밀 지방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타밀 사람들의 많은 수가 싱할라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차이로 인한 소통 문제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영국 식민 시대의 영향으로 영어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인종은 싱할라인이 85%, 타밀인이 15%를 차지한다. 인종 구성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원래 스리랑카에서 살아 오던 사람들은 싱할리족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인도에서 건너온 왕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인도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인도 남부에 살고 있던 타밀인들이 꾸준히 유입되어 스리랑카 민족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이 타밀 사람들의 유입은 영국의 스리랑카 식민 지배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캔디 인근의 고산지대가 홍차 재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국인들이 인도의 타밀인들을 노동자로 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가 독립한 이후에도 타밀인들은 스리랑카에 남았다.

 

싱할리인 대부분이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 비해 타밀인들은 주로 힌두교를 믿으며 인종적, 문화적인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영국 식민 시대에 유입된 타밀인들이 주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싱할리인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여러 차이로 인해 싱할리인들과 타밀인들 사이는 좀처럼 융합하지 못했으며 결국 폭력을 불러왔다.

 

1976년 결국 북부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약 30여년에 걸쳐 타밀 호랑이 조직과 스리랑카 정부 사이의 분쟁이 계속되었다. 2001년에 노르웨이의 중재로 일단 심각한 폭력적 분쟁은 사그라들었으나 2005년 현재까지도 아직 그 갈등의 불씨는 완벽하게 꺼지지 않은 상태다.

[편집] 종교

스리랑카는 소승 불교를 믿는 불교신자들이 대다수(69.1%)이며, 힌두교(15%), 이슬람교(7.6%), 기독교(6.2%) 신자도 존재한다.

 

스리랑카의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신앙을 갖고 있으며, 영국네덜란드의 영향으로 성공회개신교신자들도 있다.힌두교신자는 주로 인디아출신의 노동자들이다.

[편집] 문화

스리랑카는 불교문화권이기 때문에, 마을에 보리수나무등 불교의 상징물들이 있다.

[편집] 정치

스리랑카는 사회 민주주의 대통령은 6년 임기로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 수반일 뿐 아니라 국가의 수반이며 군통수권자이다. 의무로서, 대통령은 225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 대해 책임진다. 대통령은 의원들 가운데 지명하여 선택된 장관들로 내각을 구성 수반이 된다. 수상은 대통령의 대리자로 의회에서 여권을 이끌며 주로 국내 사안들에서 많은 행정 책임들을 나누어 짊어진다.

 

의회 의원들은 6년 임기로 지역구별 수정 비례 대표제에 기반한 보통(성인) 선거로 선출된다. 수정 사항이란 각 선거구마다 최다 득표 정당이 단 하나의 "보너스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의회 회기를 시작, 유보, 종결지을 수 있으며 의회 시작 후 1년이 지나면 의회를 해산시킬 수도 있다. 의회는 모든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1960년 7월 1일 스리랑카 국민은 최초의 여성 수상으로 스리마보 반다라다이케를 뽑았다. 그녀의 딸 챤드리카 카마라퉁가는 여러 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했으며,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현재 대통령은 마힌다 라자팍사로 2005년 11월 21일 임기를 시작했고 같은 날 라트나시리 비크레마나야케 또한 수상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대법원은 대통령 라자팍세가 이끄는 좌파인 SLFP(Sri Lanka Freedom Party)와 전 수상 라닐 비크레머싱허가 이끄는 상대적으로 우파인 UNP(United National Party)의 경쟁 정당간 연합으로 통제되고 있다. 또한 이보다는 작은 정당들로는 불교, 사회주의, 무슬림 정당들과 LTTE의 분리주의에 반대하지만 타밀의 자치권과 증진된 시민권을 요구하는 TNA(Tamil nationalist alliance)가 있다.

 

1948년 이후, 스리랑카는 영연방과 UN의 일원이었다. 또한, 비동맹 세력, 콜롬보 플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와 남아시아 지역협력기구의 일원이다. 냉전 기간, 스리랑카는 비동맹 외교 정책을 추구했지만 미국과 서유럽과 가깝게 지냈다. 스리랑카 군대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국방장관이 관리한다. 1980년대 이후, 군대는 JVP마르크스주의 전사들과 현재 LTTE 군사력에 맞서는 정부를 주도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인도, 미국, 그리고 유럽 국가들에서 상당한 군사적 원조를 받고 있다.

[편집] 행정 구역

스리랑카는 9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리랑카의 각 주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주의회가 관할한다. 9개의 주는 다시 25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스리랑카의 주
주도 지역
1 중부 주 캔디 캔디, 마탈레, 누와라 엘리야
2 동부 주 트링코말리 암파라, 바티칼로아, 트링코말리
3 북중부 주 아누라다푸라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4 북부 주 자프나 자프나, 킬리노치치, 만나르, 바부니야, 물라이티부, 알람빌
5 북서부 주 쿠루네갈라 쿠루네갈라, 푸탈람
6 사바라가무와 주 라트나푸라 케갈레, 라트나푸라
7 남부 주 , 함반토타, 마타라
8 우바 주 바둘라 바둘라, 모네라갈라
9 서부 주 콜롬보 콜롬보, 감파하, 칼루타라

[편집] 행정부의 문제

현재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직과 무려 104개의 장관직 가운데 5개 장관직을 겸임하고 있으며 정부 총지출액의 60%를 직접 통제하고 있다. 족벌주의와 부정부패, 뇌물, 남용들은 어쩌면 2004년 급격한 역전 이후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는 LTTE와 말뿐인 휴전 속에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거의 전면전을 치르고 있다. 타밀의 54%가 북쪽 자프나 반도 쪽에 모여 살고 있고 나머지는 남쪽에 대부분 모여 살고 있다. 타밀의 독립국 건설을 목표로 1983년부터 무장투쟁에 돌입한 LTTE는 그 후 정부군과 계속된 전투로 양측이 모두 지금까지 63,000명이 사망했다. 2002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잠시 평화로웠지만 2004년 이후 산발적이던 갈등이 심해져서 2005년 1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15개월 동안 4,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현 스리랑카 정부는 LTTE와 오랜 내전을 치르면서 군대가 주도하는 강력한 비상체제를 확립하고 있다. 2007년 1월 국회에서 통과된 비상 조치법에 따라 타밀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며칠 몇주 몇달씩 LTTE로 의심되는 또는 협력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조건 억류하는 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상황 또한 합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으며 특히 타밀 사업자들을 납치한 뒤 몸값을 받고 나서 스리랑카를 떠나라는 등의 협박을 한다고 한다.

[편집] 경제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국가를 대표하는 수출품인, 시나몬(계피나무), 고무, 실론티의 생산과 수출로 유명한 플랜테이션 경제가 되었다. 영국 통치 아래 근대 항구들의 발달은 무역의 중심으로서 섬의 중요성을 높였다. 2차 대전 동안, 섬에는 군사시설들이 설치되고 연합군들이 머물렀다.

 

 한편, 플랜테이션 경제는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1948년에서 1977년까지 사회주의는 정부 경제 정책들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식민지 농장들은 해체되고, 산업들은 국유화되고 복지국가체제를 확립했다. 국민들의 생활 수준과 읽고 쓰는 능력은 현저하게 개선되었지만, 국가 경제는 비능률과 저성장 그리고 외국투자의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1977년부터 UNP 정부는 사유화 작업과 규제철폐, 사기업 장려를 시작했다. 차, 고무, 커피, 설탕 그리고 다른 농산품의 생산과 수출 아직도 중요하지만, 농산물 가공, 직물, 전신과 금융이 발달한 산업화된 경제를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다. 1996년 플랜테이션 작물이 수출의 20%를 차지했지만 (1973년에는 93%였다) 점차 감소해 2005년 16.7%에 이르른 반면, 직물과 의류는 63%에 이르렀다.

 

1990년대 초반 GDP는 1996년 가뭄과 치안 상태의 악화로 3.8%로 떨어지기 전까지 연평균 5.5%로 성장했다. 1997-2000에서 평균 5.3%로 회복되었다. 2001년에는, 전력 부족, 예산 문제, 세계적 경기 하강, 그리고 계속되는 내전으로 역사상 최초로 위축되었다. 회복의 신호는 2002년 휴전 후에 나타났다. 콜롬보 주식 거래는 2003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을 보였다.

 

2004년 4월, 자유인민연합동맹(United People's Freedom Alliance)이라 불리는 좌파 민족주의 정당인 JVP(Janatha Vimukthi Peramuna)와 SLFP의 연립으로 UNP의 라닐 비크레머싱허가 이끄는 정부가 패배하면서 경제 정책은 급격히 역전되었다.

 

신정부는 국영기업의 사유화를 중지하고 전력과 석유와 같은 공익 사업들을 개혁하고, 라타 페르타 경제 프로그램이라 불린 보조금 지급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의 주목적은 농촌과 교외의 중소기업들(SMEs)을 지원, 오일 가격, 세계 은행과 IMF와 같은 외부 영향들로부터 국내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연료, 비료 그리고 밀과 같은 수입 물품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러한 정책은 바로 국고를 푸는 일이다.

 

2004년에만 스리랑카는 약 1억 8천만 달러를 연료 가격 안정 공약에 따라 사용했다. 보조금 지급과 공공부문 채용확대로 발생한 팽창된 예산 적자를 조달하기 위해, 정부는 결국 650억 루피(6억 5천만 달러), GDP의 약 3%를 찍어냈다. 느슨한 통화 정책과 짝을 이룬 재정 팽창 정책은 결국 2005년 1월까지 18%의 인플레이션을 야기시켰다. 이것은 스리랑카 소비자 가격 지수에 따른 수치다. 2007년 1월에도 콜롬보 인덱스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20.5%, 1월까지 1년 평균 인플레이션은 14.8%였다. 2007년 2월 23일,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12%로 올렸다.

[편집] 산업

가장 유명한 스리랑카의 산물은 보석과 홍차이다. 사파이어와 알렉산드라이트 등의 보석이 유명하며 홍차는 영국의 식민 시대에 스리랑카에 들어온 이후 온 나라에 널리 퍼졌다. 당시 스리랑카의 나라 이름은 아직 실론이었고, 거기에서 유래한 실론티라는 이름이 유명하다.

[편집] 임금과 상품 가격

대부분의 국민들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다. 예를 들면, 플랜테이션 차 노동자들의 경우, 2006년 말 임금협상에서 하루 260루피로 인상협상을 마무리했지만, 이마저도 20여일 이상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를 포함한 하루 임금이고 노동일수가 그 이하일 경우, 비가 자주 오면 모든 노동자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고, 그 경우, 통상 190루피 정도이다. 이는 하루 약 2달러로 한 가구가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도시 노동자 하루 평균 수입은 500루피(4.6달러), 2002년 평균 임금은 한달 14000루피(145달러)였다.

 

2006년 기준으로 휘발유는 리터당 90루피(2007,1월 95루피)다. 스리랑카는 아직 광회선이 연결되지 않은 까닭에 싱가포르와 전화선으로 인터넷망에 연결되는데 스리랑카 텔레콤이 독점하는 ADSL home Express(다운로드 540Kbit)는 한달 사용 요금이 2500루피, ADSL Office Express의 경우(다운로드 속도는 2Mbit) 한달 사용 요금이 6700루피이다(여기에 15% 세금이 덧붙는다).

[편집] 군사비 지출 규모

스리랑카의 2007년 국방비 지출액은 약 1억 3,966만 루피, 미화로 약 14억 달러로 2006년에 비해 46% 증가한 액수이며 정부 총 수입의 23.28%, 정부 총 지출의 16.72%에 이른다. 그리고 이 액수는 GDP(국내총생산)의 4.3%로 미국의 3.7%, 중화인민공화국의 3.9%보다 높으며, GDP 대비 비율로는 세계 30위권에 속한다. 1인당 국방비 지출액은 파키스탄(약 $30.62)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71.19이다. 그리고 병사 수 또한 124명당 1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586명 당 1명), 파키스탄(244명 당 1명), 미국(213명 당 1명)에 비해 그 비율이 매우 높다.

[편집] 내전 상황

2007년 2월 현재, LTTE에 대한 제거를 목표로 삼았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 정부 또한 같은 목표로 군사적 공세를 강화해 동부 지역을 점령 확보하고 북쪽으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LTTE의 대응은 정부 주요 인사에 대한 테러, 외국인이 주로 찾는 여행지 버스에 대한 자살폭탄테러, 수도 콜롬보 항에 대한 공격 시도 등 상징적이고 실효적, 시의적절하게 자행되는 테러이다. 결과적으로 갈등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오히려 스리랑카 정부가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LTTE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타밀족들로부터 매년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아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비난받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 돈으로 10만원에서 25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인도 타밀나두 주 불가촉 천민들 가족에게서 여자 아이들을 사서 훈련시켜 자살폭탄 테러에 투입하는 일이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자금 모집 과정에서 폭력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들도 들린다.

 

 LTTE에서 이탈해서 정부 측에서 LTTE와 싸우는 Kruna 그룹의 소년병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어린이 납치유괴를 정부 측이 눈감았다는 국제 기구의 조사 또한 진행되고 있다. LTTE의 인권침해는 상대적 약자인 저항적 투쟁체들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LTTE는 자신들의 지역에서 사실상 하나의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다. 세금을 걷고 정부 조직에 준하는 조직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LTTE에 대한 온정적 태도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테러에 대응한 정부의 조치들은 통행하는 모든 차량과 사람들에 대한 엄격한 검문과 LTTE로 의심되는 타밀인에 대한 억류 등등이 행해진다. 수도 콜롬보의 경우 20-30m마다 한두 명씩 군인들과 보안요원들이 수시로 검문검색을 행한다.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여권이 없으면 경찰서까지 가야한다고 한다. 전국에서 벌어지는 납치, 살해, 실종, 유괴, 등등은 인종간 갈등을 넘어 사적 이득을 챙기는 일로 야기되는 경우들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인권침해와 폭력이 증가 일로에 있지만,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 비판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해야할 언론에는 재갈이 물려 있다.

 

양측간의 갈등 해결의 출발은 정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그것은 평화적 문제 해결에 대한 국민적 여론을 모아내겠다는 의지에서 체결한 UNP와 MOU에 대해 스리랑카 지식인들은 최선의 해결책으로 보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북아일랜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하는 집단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들의 자치권을 최대한 부여하고 양측의 평화적 세력이 협력 공존을 증진시킬 때 무장투쟁 집단 또한 그 흐름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을 위해 현정부와 야당인 UNP 사이 체결된 MOU는 현 대통령의 탈당한 20명의 UNP 의원들에 각기 장관직을 부여함으로써 2007년 2월 현재 휴지가 된 상황이다.

 

2009년 5월 17일에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LTTE가 결국 패배를 시인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서, 1983년에 시작되어 26년간 이어져온 내전이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7]

[편집] 대한민국과 스리랑카

2005년 현재 많은 스리랑카인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상당한 수의 한국인들 역시 스리랑카에서 살며 일하고 있다. 수도인 콜롬보에 한국 대사관과 KOICA 사무소가 있다. 한국과는 1977년에 수교하였으며 1972년 통상대표부가 설치되었다가 1977년 한국 - 스리랑카 수교와 함께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1978년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몰디브>

 

ހިވެދި ގުޖޭއްރާ ޔާއްރިހޫމްޖު
몰디브의 국기 몰디브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ޤައުމީ ސަލާމ
몰디브의 위치
수도 말레
4°10′30″N 73°30′32″E / 4.175°N 73.508889°E / 4.175; 73.508889
공용어 디베히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대통령
부통령
모하메드 나시드
모하메드 와히드 하산
독립
• 독립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5년 7월 26일
면적 298 ㎢ (185위)
 • 내수면 비율 0 %
인구
 • 2005년 어림 329,000명
 • 2006년 조사 298,842명
 • 인구 밀도 1,105명/㎢ (9위)
GDP (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25.69억 (162위)
 • 일인당 $7,675 (79위)
HDI 0.749 (99위, 2006년 조사)
통화 루피야 (ISO 4217: MVR)
 • 여름 시간 없음
ISO 3166-1 462
ISO 3166-1
alpha-2
MV
ISO 3166-1
alpha-3
MDV
인터넷 도메인 .mv
국제 전화 +960

 

몰디브 공화국 (디베히어: ދިވެހިރާއްޖޭގެޖުމުޙޫރިއްޔާ 디베히 라제이제 줌후리야, 문화어: 말디브 제도)는 인도양 중북부에 있는 나라이며 수도는 말레이다.

 

[편집] 역사

몰디브 제도에는 BC 1세기경 스리랑카인도로부터 싱할리인이 건너와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북부는 인도(드라비다)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처음에는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12세기 중엽부터 아랍인과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아랍인에 의한 이슬람교 포교활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 주민이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1887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스리랑카에 식민지로 편입되었으나, 1948년 스리랑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아울러 영국 직할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 후 일시적인 공화제를 거쳐 1965년 7월 영국과의 손을 끊고 완전 독립을 달성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가입하고 1968년 11월 신헌법을 시행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1985년 7월에 영국연방에 정식 가입하였다. 2008년 10월 8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최장기 집권 대통령으로 알려진 마우문 압둘 가윰이 우세를 보였으나, [1] 10월 29일에 야당 후보였던 나시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2]

[편집] 지리

스리랑카의 남서 약 650km에 있으며, 8°선해협(Eight Degree Channel)에서 동경 73°선을 따라 적도 남쪽까지 남북으로 약 760km, 동서 128km의 해역에 흩어져 있는 1,192여 개의 작은 산호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202개 섬에서만 사람이 산다.

[편집] 수몰 위기

몰디브는 가장 높은 지점이 해발 2m에 불과해 수몰 위기에 처해 있다.

 

 2008년 11월 11일 대통령에 취임한 모하메드 나시드는, 국토가 바닷속으로 사라질 날에 대비해 새로운 국토를 살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겠다며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에 처한 몰디브가 새로운 국토를 돈을 주고 사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이미 여러 나라와 접촉했으며 수용 가능한 방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몰디브와 기후조건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인도, 스리랑카가 최우선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며 땅이 넓은 호주도 고려 대상에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편집] 기후

기후는 고온 다습한 열대성기후로 1년은 남서몬순계(5~10월)와 북동몬순계(11~4월)로 나뉜다. 남서몬순계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강우량이 많으나, 북동몬순계에는 공기가 건조하고 바람이 잔잔하여 비교적 견디기가 쉽다. 우계의 변절기에 해당하는 3~5월은 1년을 통해서 가장 더운 시기이다. 연평균 기온은 24~30℃이고. 연평균강우량은 1,869mm이다.

[편집] 주민

국가의 인구는 26만 3,189명(1997년 조사)이다. 토속 언어인 디베히어는 인도-유럽어군에 속하지만, 영어가 널리 쓰인다. 문맹률은 98%이고 종교는 100% 이슬람교이다.

[편집] 언어

공용어는 디베히어이다. 또 영어도 통한다. 관광지나 휴양지에 따라서는 독일어, 이탈리아어도 사용한다. 또한, 디베히어는 사용 인구가 약 300,000명에 불과하며, 미래에는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

[편집] 종교

종교는 이슬람교수니파국교이다. 주민의 거의 100%가 무슬림으로 세계의 나라들에서 국민의 100%가 이슬람 교도인 나라는 몰디브오만, 사우디아라비아뿐이다. 그 외 소수종교로는 기독교가 있는데 전체 종교인 중에서 0.1%를 차지하며, 기독교 매체가 제한받는 등 종교의 자유를 제한받고 있다.

[편집] 문화

이슬람 문화가 주요 문화이다.

[편집] 행정 구역

7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주는 다시 21개 행정 환초(20개 환초와 수도 말레 환초)로 나뉜다.

[편집] 외교관계

대한민국과 1967년 수교하였으며 한국관광객이 많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스리랑카 대사관이 공관을 겸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0년 수교하였다. [3]

 

<티베트>

 

 

            티베트 망명정부가 주장하는 티베트의 영역
중국 정부가 정한 티베트 영역
티베트 자치구
인도악사이 친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중국티베트 자치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그 외의 티베트 문화 영향권

좌표: 29°39′00″N 91°06′00″E / 29.6500°N 91.1000°E / 29.6500; 91.1000

1912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제정한 설산사자기로, 현재는 티베트 망명 정부가 티베트의 기로 사용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 독립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티베트(티베트어: བོད 보드, 중국어: 西藏 시짱[*])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원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일부(시짱 자치구)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일부가 인도에 포함되기도 하며,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공식적인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기도 한다. 티베트의 주권과 관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된 시기와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된 것이 국제법상 효력이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이견이 있다.

 

[편집] 개요

티베트는 중국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1]

[편집] 티베트 신화

티베트 신화는 진화론과 과거 티베트 지역의 상당부분이 바다였음을 알고 있었던 듯한, 신비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먼 옛날 이 설역 고원은 바다였다.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니 거품이 일어나고 이 거품들이 쌓이고 쌓이자 육지를 형성하였다 …(중략)… 시간이 또 흘러 남해 바닷가 보따낙가산 관음보살은 변종으로 나타난 원숭이를 보고 그를 대륙으로 보내어 살게 했다. 원숭이는 불도를 지키며 얄룽 계곡의 한 동굴에 살게 되었는데, 수컷 원숭이는 '투' 였고, 암컷 원숭이는 '초' 였다. …(중략[2])… 그 후 나찰녀와 원숭이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섯 자식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점차 털이 줄고 꼬리가 짧아지면서 일어나 사람처럼 변하였고, 결국 사람이 되었다.

[편집] 역사

[편집] 선사시대

1만여 년 전부터 티베트 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3] 중국어와 고대 티베트미얀마어군은 티베트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고 중국인들은 황하에서 을 재배하기 시작한 기원전 4,000년경에 분리되었다고 추측된다. 티베트인들은 약 500년경에 미얀마와 분리되었다.[4][5]

 

철기시대의 구릉지 마을과 매장지가 티베트 고원에서 발굴되었는데, 티베트의 고대 문서를 따라 샹슝(象雄 Zhang Zhung)문화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뵌(Bön) 지역 문화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편집] 티베트 왕조(토번)

티베트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중국 사서로 보면, 「신당서」엔 4세기 첸뽀(贊普, 토번 왕을 이르는 명칭) 라토토리넨쩬(拉托托日年贊)이 '줘떠투두' 로 기록되어 있다).[6]

 

 기원전 2세기에 티베트에 여러 국가가 등장하였으나 티베트 최초의 통일 국가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63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티베트 왕조를 열었고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文成公主, 625~680)와 네팔의 공주인 브리쿠티 데비와 혼인하였다. 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

 

670년 ~ 692년에는 당과 대비천 전투(669년)를 통해 타림 분지와 인접한 신장카슈가르시를 점령하고, 승풍령 전투(678년)에 승리해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나 692년 중국 왕조 당나라의 장수 왕효걸이 이끄는 군대에 서역을 빼앗겼다. 당은 이 기세를 몰아 토번을 압박하고자 했으나 토번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가르친링(대비천, 승풍령 전투 승리시의 지휘관)에 의해 소라한산에서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아랍, 동부 투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747년에는 당나라의 장군인 고선지의 원정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티베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750년까지 티베트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대부분 잃었다.

 

고선지751년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칼룩스의 연합군에 패하였고,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티베트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티베트는 북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고, 763년 안사의 난 때에는 당나라가 토번에 매년 바치던 공납을 중단한 것을 빌미삼아 그 당시의 첸뽀 치쏭데쩬(赤松德贊)이 다짜뤼공(達札樂宮)을 동정원수로 임명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잠시 점령하기도 하였다.[7][8][9]

820년경의 세계. 티베트는 중국(노랑색) 남쪽의 짙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821년 또는 822년에는 티베트와 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두 나라의 국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양국 언어로 기록된 이 조약은 라싸조캉사원 앞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10]

 

티베트는 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티베트는 토번(吐蕃)이라 불렸고, 티베트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3세기 동안 9대의 왕이 다스렸다.

[편집] 몽골과 청나라

1920년1925년 사이에 사용된 티베트 국기

 

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간접적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편집] 티베트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의 13대 달라이 라마중화민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1913년 몽골과 양측이 독립 국가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으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몽골에는 러시아, 티베트에는 영국이 무기, 차관을 제공하는 등 외부의 지원이 있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몽골과 티베트를 독립국으로서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티베트 독립 이후에 중국국민당 등의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 영역 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1918년1930년에는 티베트 영내로 침입한 중국 군대를 격퇴하는 등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했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화민국행정원몽장위원회을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 티베트 대표처'라는 이름으로 라사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싸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기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무력 점령할때까지 영국군의 무선기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편집] 중국의 지배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은 독립국으로서 존재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였으나, 북경정권의 시대에는 군벌의 혼전, 남경국민정부 시대에는 대일전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에 대하여 압력은 행사하였으나 본격적인 군사적 침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워졌다. 이때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한다.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1951년 5월 23일 티베트와 십칠조협의를 체결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로써 티베트는 최초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인에 대한 고문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지배하였고, 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통치를 유지하였다. 티베트의 중국 귀속 이후로 망명을 떠난 티베트인들의 일부는 동화정책에 따라 티베트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한족의 이민을 실시하여 한족의 인구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11] 최근 중국 정부는 포탈라 궁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행하였고, 2005년에는 티베트로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편집] 1959년 티베트 봉기

이 부분의 본문은 1959년 티베트 봉기입니다.

[편집] 2008년 티베트 반중국 시위

2008년 3월 10일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수도승) 600여명의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되어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독립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고,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사태가 격화되었다.

[편집] 지리와 생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네팔과의 국경에는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수도(중심지)는 라싸(Lhasa, 拉薩)이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특성 때문에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한족의 유입에 따른 지역 경제의 성장으로 티베트 특유의 환경은 위협받고 있다. 티베트의 70%는 초원이어서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편집] 기후

고산 기후의 특징을 띠고 있다.

[편집] 주민

티베트 여인

대체로 티베트인이 거주하고 있으나,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한족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편집] 종교

종교는 티베트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존중되는 문화의 한부분이다. 티베트의 주요 종교불교이며, 그리스도교(기독교)등의 이웃종교는 극소수로 존재한다.17세기 포르투갈기독교 선교사들은 티베트를 서구 사람들에게 알렸다.[12]

[편집] 티베트 불교

불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7세기에 국교의 자리로 차지하였다. 이 불교가 티베트의 특유의 문화인 티베트 불교로 발전한다. 티베트 불교는 바하라야나(Varjrayana)의 독특한 형식을 따른다. 티베트의 불교는 티베트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네팔, 부탄, 라다크 등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진다. 티베트인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아주 작은 의문조차 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통치 이후 열렬한 종교 활동에 의문을 품은 중국 정부에 의해 불교는 정치화되었다.[13]

[편집] 언어

티베트인들이 쓰는 언어는 티베트 문자로 되어 있는 티베트어이다. 티베트 문자는 부탄의 공용어인 종카어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티베트 고원과 부탄에서도 사용되고, 네팔의 일부와 인도 북부의 시킴 지역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시노-티베트어족(Sino-Tibetan)의 티베트미얀마어군에 분류된다. 티베트말에는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티베트와 다른 히말라야의 언어들은 종종 불분명하다. 티베트어의 다양한 방언을 고려하면, 티베트어족은 티베트 고원에 걸쳐 약 6백만 명이 사용하며, 약 15만 명의 망명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티베트 문자는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에 기원한다.[14]

[편집] 요리

티베트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식물이 별로 자라지 않아 주로 야크를 이용하는데, 특히 야크의 젖으로는 우유, 치즈 등을 만들 수 있다.

[편집] 관련 항목

<인도>

 

 

<몰디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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